비고 몰텐센(Viggo Mortensen)-빠져들지 않을 수 없어 [창고/사랑해마지 않는 그들] 1998년도던가요. TV에서 해주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G.I.제인G.I.Jane]의 데미 무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영혼Ghost]에서의 몰리, [세븐 사인The Seventh Sign]에서의 애비 퀸,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의 헤스터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여 있던 제게 있어 머리를 삭발하고 정글에서 뒹구는 데미 무어의 모습은 참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런데 웬일입니까. 분명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데미 무어였습니다. 그다지 유쾌하게 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밉살스럽다고 말하는 교관 잭, 저는 그 사람이 이상하게도 참 좋아보이는 겁니다. 야간훈련 때 조던의 손을 놓아버린 코테즈에게 삽을 던지며 ‘전우라는 단어를 먼저 배워라.’라고 나직하게 경고하는 교관 잭. 생존훈련에서 가차없이 조던을 폭행하다 결국 훈련을 통과하고 자신에게 욕지기를 내뱉는 조던을 바라보는 잭의 시선. 상점에서 물건을 사갖고 나가는 조던을 유리창 너머에서 바라보던 잭의 눈빛…. 네, 한 마디로 ‘필이 꽂혔다.’라는 거겠죠. 분명 가혹하고 냉정한 교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사려깊은 사람.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의 첫 이미지는 그랬습니다. 우연일까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의 웹스 역시 잭의 이미지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진 해크만과 댄젤 워싱턴 사이에서 핵미사일의 발사키를 쥐고서 고뇌하는 그의 모습 역시 군인으로서 따라야 할 명령체계와 인간으로서 따라야 할 도리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죠. 친구 댄젤 워싱턴에게 보여주던 따스하고도 유머러스한, 한편으로는 잠수함의 계기판의 붉은 불빛 아래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심하던 모습. 과격한 행동이나 급진적인 결단을 내리지는 않지만 신중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깊게, 인상이 남았습니다. 비고 몰텐센이 연기한 대부분의 인물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것이죠. 위의 [G.I.제인]이나 [크림슨 타이드]는 물론이고 기네스 팰트로, 마이클 더글러스와 함께 나온 [퍼펙트 머더A Perfect Murder]에서도 그랬습니다. 기네스 팰트로와 마이클 더글러스 둘 모두를 속이고 사기를 치면서도 데이빗(비고 몰텐센)은 기네스 팰트로의 사진을 간직합니다(결국은 어이없이 칼 맞고 죽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위험한 매력, 하지만 어딘가 숨어있는 순수함과 천진함. 이런 이미지는 [베일 속의 카이로Ruby Cairo]에서도 비슷합니다. 아내 앤디 맥도웰에게까지 자신이 죽었다고 믿게 한 다음 대규모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결국 자신이 벌여놓은 사기극의 덫에 걸려 역시 총을 맞게 되지만요. -_- 남편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게 된 앤디 맥도웰은 그를 원망하지만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합니다. 남편의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영화들과 함께 못 말리는 알코올 중독자로 나오는 [28일간28Days],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가 어이없이 죽는 [데이라잇Daylight](정말 어이없습니다. 비고 몰텐센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보시려는 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총격전에 휘말려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데다 마약중독에 빠지는 랄린 역을 연기한 [칼리토Calito's Way] 등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참으로 가지각색입니다. 하지만 비고 몰텐센을 통해 표현되는 캐릭터는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왠지 시선이 머물게 되는 사람, 그러다 결국 마음을 뺏기고 마는 사람입니다([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Lady]에서 왜 니콜 키드먼이 비고 씨를 뿌리쳤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요-_-). 비록 그 비중은 작지만 영화의 전개에서 중요한 고비를 담당하는 역할이죠. 주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의 소유자. 그런 이미지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가 원래 지닌 인간적인 면모인지, 아니면 그런 캐릭터를 잘 연기해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역할을 맡든 간에 그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Witness]에서 대사 몇 마디 없던 젊은 농부로 영화에 데뷔했던 그때는 해리슨 포드의 옆의 옆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비록 잠시 스쳐 가는 조역에 불과했지만 그는 차곡차곡 영화의 무게중심을 잡는 데 필요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LotR』에서 아라곤이라는 메인 캐릭터를 맡아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요. 원작에서 이실두르의 후계자이자 곤도르의 왕인 고귀하고도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라곤 텔콘타르에서, 보다 인간적이고 섬세하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경계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들의 왕으로 거듭나는 아라곤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에 의해 완벽하게 스크린 속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와 영화 속 아라곤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비고 몰텐센은 화가이자 사진작가, 시인으로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습니다. [퍼펙트 머더]에서 데이빗의 그림과 사진이 비고 몰텐센의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한 에피소드이고, [G.I.제인]에서 D.H.로렌스의 시를 인용하는 장면은 비고 몰텐센이 직접 리들리 스코트에게 그 장면을 넣자고 제안했다고 하지요. 『LotR』의 DVD 서플먼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안 맥켈런, 크리스토퍼 리에 못지 않게 동료 배우와 스태프·감독에게 배우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소화해 내기 위한 극진한 정성. 주위 사람들을 자신에게 몰입시키는 묘한 힘과 카리스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반전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당당함.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역할을 여럿 맡아왔음에도 매너리즘이나 비슷비슷한 느낌이 아닌 매번 새로운 인물의 새로운 매력을 창조해낼 줄 아는 배우로서의 묵직한 존재감. 그의 사진이나 그림, 시에서 엿보이는 풍부한 예술적 감성. 이 모든 것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에게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이제 『LotR』의 아라곤을 뛰어넘은 또 다른 그의 자리를 다져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꼬리> 크리스토퍼 워큰과 함께 나온 [The Prophecy]를 아직도 못 봤습니다. T_T 어디서 구할 수 있을런지. 비고 몰텐센 : imdb.com 2004. 1. 6. 2005/11/26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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