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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エマ Emma)-레이스를 향한 그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
지은이: 모리 카오루(森薰)
출판사: エンタ-ブレイン / 북박스
권수: 4권~(2001~)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지 한두 번씩은 갖고 있을 경험 중 하나를 꼽아보자면,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친구들과 함께 얘기하며 살을 붙여나가는 것이다. 무심결에 연습장 한 귀퉁이에 슥슥 그려본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이름도 붙여보고, 그(혹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도 만들어보고, 하나 둘 다른 등장인물도 만들어보고…. 완결의 여부를 떠나서, 산속의 돌 틈 사이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샘물마냥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잡아놓으려 연필 끝을 잘근잘근 씹어보기도 하던 즐거운 경험. 모리 카오루의 『엠마』는 바로 그런 경험들을 생각나게 하는 만화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치찬란하기 그지없는 내용이지만 그 당시에는 연습장에 가계도며 인물별 특징이며 인상깊은 장면과 대사 등을 빼곡하게 적어가며 즐거워했던 기억, 기억들. 아련하고, 그립고, 그럼에도 다시금 가슴 한구석을 뛰게 만드는 묘한 설렘과 흥분. 만화를 읽으면서 그 내용 자체에 몰입하여 즐거워지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은은한 기쁨에 웃음짓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마음 한 구석이 들뜨는 듯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점도 없지 않다. 시대의 격동기인 19세기 말 산업혁명의 물길이 휩쓴 곳, 런던. 부와 계급이 서로의 위치를 미묘하게 자극하며 공존하던 시대. 자신의 결혼문제로 아버지와 대립하게 된 윌리엄과, 케리가 죽은 후 자신의 거취를 스스로 결정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된 엠마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묻어둔 채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귀족은 아니지만 명문가의 뛰어난 자제와 총명함과 차분한 심성으로 그 미모를 감싸고 있는 메이드의 사랑 이야기. 두근두근 울렁울렁 사랑의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불꽃같은 사랑을 만들어가는 할리퀸 로맨스 소설로 써도 딱 들어맞을 내용이건만, 『엠마』의 흐름은 석간신문을 뒤적이는 느긋한 오후의 티타임마냥 지극히 조용하고 완만하다. 심지어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게 된 계기조차도 명확하지 않을 정도. 윌리엄은 엠마에게 지금껏 접한 상류계급 여자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좋아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엠마가 어떤 이유로 윌리엄을 좋아하게 되고 그토록 그리워하는지는 사실 알기 힘들다. 작품의 타이틀롤을 맡고 있으면서도 정작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도 조금은 실망스러운 부분이다. 출신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 메이드라는 신분이 그녀를 더욱 소극적으로 만드는 요인일까.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3권 이후 윌리엄의 어머니가 등장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에 불을 붙일 수 있을 듯한 예감, 그로 인해 엠마와 윌리엄이 변화할 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덕분에 앞으로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 요즘이다.

아마도 작가는 『엠마』를 그리면서 예전의 내가 느꼈던 설렘과도 같은 기분으로 열심히 펜터치를 하고 레이스의 선 하나하나에 몰입했을지도 모르겠다. 남을 만족시키기 이전에 이 이야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내 자신이 즐거워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흡족한 기분이랄까. 현란한 컷 분할 대신 전형적인 직사각형의 컷 안에 꽉 들어찬 소품과 복식의 세밀한 묘사는 작가가 이 작품에 쏟고 있는 애정과 열정이 얼마만큼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게다가 본인 입으로 메이드 광임을 밝히는 작가 후기라니!!). 치마 속 겹겹이 다리를 감싸고 있는 레이스, 몸을 졸라매는 코르셋과 풍성한 속치마 속에 숨겨진 긴 구두, 머리 부분의 레이스 장식을 그릴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말하는 작가가 그리는 작품이라면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늘 좋아하고 꿈꿔오던 것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만화가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이며 축복이 아닐까. 좋아하는 것들을 종이 위에 가득 펼쳐놓고 하나 둘씩 정돈하며 가슴속에 담아둔 이미지를 옮기며 기쁨에 한껏 겨워하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은 반대로 정적인 분위기를 띠고서 작가의 열정과 묘한 균형을 이룬다. 이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조금씩 용기를 내기 시작한 엠마와 윌리엄, 그리고 엠마의 레이스와 윌리엄의 신사복을 그리며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작가를 떠올리며 나는 내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고 미소짓는다. 이 또한 『엠마』를 읽는 독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설렘이 아닐까.


200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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