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빈즈(ジェリ-ビ-ンズ)-가슴 속에서 빛나는 그 무엇을 찾아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안노 모요코(安野モヨコ)
출판사: 시공사 권수: 전5권 누구나 어릴 적 “커서 뭐가 될 거야?”라는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 과학자, 화가, 피아니스트….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의 행적을 마냥 눈으로만 따라가던 어린 시절이 지나면 가슴속에 품고 있던 미래상 역시 다른 모습으로 조금씩 바뀌어가기 시작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면 즐거운 것, 언제나 질리지 않고 몰두할 수 있는 그 무엇.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손에 넣은 이들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부러움을 사게 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더욱 더. 『젤리빈즈』의 주인공 마메는 뜨겁게 달군 철판 위에서 톡톡 튀어오르는 콩(=마메)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보고 듣는 모든 것에서 만들고픈 옷의 아이디어를 얻고, 빼어난 미모를 지닌 친구나 동경하던 모델들을 만나면 그네들에게 어떤 옷을 입힐 지를 궁리하며 스케치에 열을 올리는 마메. 그저 즐거움만으로 옷을 만들던 그녀는 고등학생임에도 디자이너 못지 않은 감각을 지닌 후쿠다 란도를 만난 후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옷’을 만드는 일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되지만 어느 순간 벽에 부딪치고 만다. 유행이 무엇인지, 패션은 무엇인지, 인정받을 수 있는 옷이란 어떤 것인지, 나만의 감각이란 게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과 괴로움 끝에 마메는 결국 가위를 들고서 묵묵히 옷본을 자른다. “그래도, 옷을 만들어.” 옷을 만드는 게 그저 좋고,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부터 한없는 그리움까지 알게 해준 오랜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평범한 여자애들의 만족스런 미소에 가슴 설레어하는 평범한, 그러나 옷을 향한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마메의 선택은 결국 옷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 아름답고 완벽한 몸매의 모델들이 무대에서 입는 화려한 옷이 아니라 적은 용돈을 쪼개어 장만한, 마음에 꼭 드는 옷 한 벌이 주는 기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마메가 만든 옷을 싫어할 여자애가 그 누가 있을까. 같은 패션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야자와 아이의 『내 남자친구 이야기』나 『파라다이스 키스』에 비하면 시각적인 화려함과 세련됨이 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젤리빈즈』는 안노 모요코만의 원색적인 리듬감으로 가득 차 있다. 다소 가파르다 싶은 내용전개이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흐름은 주인공 마메의 생각·행동과 일치한다.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모든 것을 옷으로 표현하려 정신없이 스케치화를 그려대고 하나라도 놓칠세라 가위질을 해대는 마메를 보노라면, 읽는 사람마저 어느새 턱까지 숨이 차올라 잠시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이니. 옷감의 올 하나하나를 매만지는 듯한 섬세함은 아니어도 열정으로 가득 찬 거친 순수함은, 애써 예쁜 척 하지 않은 역동적인 안노 모요코의 그림에 힘입어 그 느낌을 한층 더하며 급기야 보는 이의 어깨까지 들썩거리게 만든다. 남들과는 분명 다른 감각을 지닌 이들의 이야기건만 『젤리빈즈』를 읽으며 별반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마메의 고민과 내 기억의 한 부분이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아마도 이 점이, 야자와 아이의 작품과는 또 다른 안노 모요코만의 매력일 것이다). 나 역시 마메처럼 연습장에 낙서 아닌 낙서를 휘갈기며 머릿속에서 금방이라도 빠져나갈 것만 같은 생각의 단편들을 잡으려 애썼고, 재능있는 이들의 흔적을 엿보며 한없이 모자란 자신을 질타했다. 다만 마메와 나의 차이라면, 그녀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붙잡고 놓치지 않았지만 나는 ‘현실’을 핑계로 어느샌가 도망쳐 버렸다는 것. 그렇기에 넘어졌다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는 마메를 보며 질투아닌 질투를 하고, 격려아닌 격려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을 잡고서 끝까지 안간힘을 쓰던, 누구나 한번씩은 겪어보았을 안타까운 기억. 『젤리빈즈』를 읽을 때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앞으로 남은 시간에 대한 각오로 마냥 부풀어 오르는 것은 나만의 감정일까. 오늘도 나는 『젤리빈즈』를 읽으며 아직 빛바래지 않은 나만의 ‘무엇’을 향해 종종걸음친다. 2004. 12. 3. *리브로(http://libro.co.kr) 제2회 독자리뷰대회용으로 쓴 글을 아주 약간 수정했습니다. 2005/11/2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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