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맥주마시다 갑자기 생각난 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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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안 드세요?”
“난 이거면 돼.”
믹서에 토마토를 두 등분으로 잘라 넣으며 그가 살짝 웃었다. 서둘러 차린 아침상이 부끄러워졌다. 혹시나 늦잠을 자버릴까 자기 직전 취사를 눌러놓았던 밥솥에서 막 퍼낸 따끈한 밥. 미리 멸치다시국물을 우려내어 끓인 된장국. 그가 좋아하는 매운 꽈리고추와 함께 볶은 멸치볶음. 그저께 본가의 냉장고에서 슬쩍 갖고 온 갓김치와 이제 맛이 들기 시작한 양념이 담뿍 배인 배추김치. 언젠가 그가 맛있다며 사먹던 삼각김밥이 생각나서 미리 만들어두었던 쇠고기고추장볶음. 국 말고 따뜻한 반찬이 없는 것 같아 급하게 부친,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린 달걀 프라이. 막 포장을 뜯은 도시락용 김 한 봉지.
“그래도 아침밥 먹는 버릇 해두는 게 좋대요. 특히 위장 안 좋은 사람은요.”
“정하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가 없어. 언니의 입버릇이었다. 점심과 저녁은 쉬이 건너뛰는 일이 있어도 아침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꼭 챙겨먹곤 했다. 과음한 다음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먹히지 않는 밥을 억지로 데운 보리차에 말아 한 숟갈씩 겨우겨우 떠먹으면서도 아침밥 한 그릇은 거르지 않았다. 너도 미리 아침먹는 버릇 들여두는 게 좋아. 찬 시리얼 같은 걸 아침부터 먹으면 위장이 놀랜다구. 눅눅해진 콘플레이크를 숟가락으로 휘젓는 내게 언니가 곧잘 하던 말이었다.
“엠티에 가서도 말야.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지쳐 쓰러지면, 자기도 같이 마시다 새벽에 뻗은 주제에 꼭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했거든. 아무도 아침밥 먹는 사람 없으니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 혼자라도 먹어야겠다면서 밥을 하더라구. 다들 정하가 밥을 하든 말든 술 취한 채 계속 자기 바쁜데, 자다 기척이 느껴져서 보면 혼자 민박집 마루에 걸터앉아 막 지은 밥이랑 안주로 먹다 남은 김치랑 참치랑 같이 밥을 먹고 있거든. 혼자 먹으면 맛없지 않냐고, 같이 먹자고 하면 잠 덜 깬 채 밥 먹으면 체한다면서도 자기 밥 덜어주고…그래서 같이 먹고….”
잦아드는 그의 목소리가 요란스런 믹서기 소리에 묻혔다. 윙―. 몇 초만으로도 토마토는 쉬이 갈린다. 그가 머그잔 두 개에 갈은 토마토를 나누어 붓고 한 잔은 내게 건네주었다. 토마토를 갈아먹는 것도 역시 언니가 하던 것이다. 아침밥을 먹은 후 언니는 토마토를 꼭 한 개씩 갈아먹었다. 그냥 먹으면 잘 안 먹히는데 이렇게 갈아서 먹으면 훨씬 맛있게 잘 먹히거든. 싫다는데도 부러 토마토 두 개를 갈아서 내 손에 한 컵씩 쥐어주곤 했다. 아침밥 안 먹을거면 이거라도 먹어. 늦게 오면 집에서 과일 먹을 새도 없잖아.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야채야. 토마토의 신맛 때문에 인상을 쓰며 종알대고 있으면 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곤 했다.
그가 토마토 주스 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그는 어쩌다가 아침에 토마토를 갈아먹게 되었을까. 언니가 알려주었을까. 언니가 그에게 갈아주었을까. 그렇다면 언제? 물어보면 아마 그는 선선히 대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듣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서없이 입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질문들을 밥 한 숟갈과 함께 꾹 눌러 삼켰다. 아침밥을 꼭 챙겨먹던 언니는 이제 없고, 그는 아침밥 대신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나는 그의 앞에서 언니가 아침밥을 먹던 것처럼 밥을 먹는다.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있는 밥알을 삼키려고 후루룩 국물을 떠먹었다. 연거푸 두세 숟갈을 떠먹었는데도 목은 점점 꽈악 메어왔다. 그가 내 얼굴을 볼까봐 얼굴을 숙인 채 쉼없이 손을 놀렸다. 고추장볶음 한 젓가락을 밥 한 숟갈 위에 얹고 다시 김을 그 위에 얹었다. 김 위에 자잘하게 뿌려진 잔소금이 까슬하니 입술에 달라붙었다. 입안의 것을 다 씹지도 않고 다시 멸치볶음을 집어들었다. 고추의 매운 향이 코를 찔렀다. 그는 조금씩 토마토 주스를 마셨고 나는 더욱 재게 손을 움직여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마지막 밥 한 숟갈을 꼭꼭 씹고 있으려니 그가 보리차 한잔을 내 앞에 갖다 놓았다. 말없이 그가 떠다 준 물을 다 마셨다. 그는 주섬주섬 식탁 위의 빈 그릇을 챙겼고 나는 멍하니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밑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그릇들을 부셔서 차곡차곡 식기건조대 위에 쌓아놓았다. 찬장 서랍에서 빨아놓은 행주를 꺼내 물에 적셔 식탁 위를 훔쳐내고, 키친타올로 다시 식탁 위의 물기를 말끔히 닦아냈다. 흐르는 물에 행주를 다시 헹구어 물기를 꼭 짜내고 손까지 깨끗하게 씻은 다음 물기를 탁탁 털며 그가 돌아섰다. 그의 모습이 순간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부옇게 흐려졌다. 조금은 안쓰럽다는 듯, 조금은 난감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손을 뻗었다. 내밀지 말아요. 기대하게 만들지 말아요. 당신이 아무생각 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 손길 한번에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아. 입밖으로 비어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간신히 삼키며 흐트러지는 숨을 다잡았다. 온몸으로 내뿜는 경고신호를 알아차린 것일까. 얼굴로 다가오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멀어져갔다. 거실에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다 내미는 손길이 방금 전처럼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티슈를 건네받을 때 둘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깐의 온기,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여기까지가 그와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위치이고 다가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 긴 호흡 한번만으로도 내 숨의 습기에 녹아버리는 티슈 몇 장에 나는 한참동안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것이, 그와 함께 한 최초의 아침식사였다.
Fin.
2005.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