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바비차(Grbavica)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Jasmila ŽBANIć)
주연: Mirjana Karanović, Luna Mijović, Leon Lučev, Kenan Ćatić 제11회 PIFF 상영작/2006. 10. 13. 대영시네마 3관 ![]() 잠에서 깬 딸은 아직 이불 속에 누워있는 엄마에게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린다. 베개를 서로 집어던지며 장난을 치는 다정한 모녀, 환하게 쏟아지는 아침햇살 아래 함께 뒹구는 그들은 더없이 행복하게만 보인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진 엄마 위에서 웃음짓는 딸을 올려다보는 엄마의 표정이 순간 확 굳어지더니 그예 딸을 밀쳐내고야 만다. 잠깐의 행복마저 용납하지 못한 채 산산히 깨지게 만들어버리는, 아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평생을 지고 가야할 아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던가.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자기 힘으로 매 끼니를 해결하고 사랑하는 이를 보듬어 안고서 다가올 내일을 꿈꾸며 잠자리에 드는, 가장 소박하고도 찬란한 행복. 그 이상 가는 게 어디 있을까? 제 아무리 아등바등 다투며 살아도 결국은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충만한 행복을 찾기 위해 줄달음질치는 것을. 그러나 손을 내밀면 잡힐 것만 같은 그 작은 행복은 한 사람의 인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막연한 것들에 의해서 뿌리채 뽑혀질 때가 있다. 종교, 국가, 민족, 이념. 백과사전에서 몇 개의 단어의 나열로만 설명되어 있는, 실체도 없는 그 무언가에 의해 수많은 이들이 죽고 강간당하고 푸른 대지 위에 피에 흠뻑 젖은 검은 증오의 꽃을 피워낸다. 영화는 주인공 에스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만 만원버스 안에서 자기 옆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의 체모를 보고 견디다 못해 버스에서 뛰어내리거나, 에스마가 일하는 클럽의 사장과 쇼걸이 벌이는 질펀한 색정적 놀음을 목격하고 숨죽여 흐느끼는 모습 등을 통해 전혀 치유되지 않은 채 갈기갈기 헤어져만 가는 그녀의 상처를 암시한다. 한때는 꿈이 있었고 행복을 누렸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았을 에스마와 그녀들을 무참히 짓밟은 이들.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던가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단지 에스마와 그녀들이 보스니아인이었다는 것과 그녀를 윤간한 이들이 세르비아인이었다는 것뿐. 10여년이 넘도록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침묵했던, 아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에스마는 친아버지의 존재를 알고자 하는 딸 사라의 절규 앞에서 그만 폭발하고 만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아니, 계속되어야만 한다.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깊숙이 묻어두려고만 했던 에스마는 같은 전쟁의 아픔을 겪는 여인들 사이에서 띄엄띄엄 그동안의 아픔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상처를 마주 대하기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시신들이 매장되어 있던 눈 덮인 땅위에도 어느덧 봄이 찾아와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끝없는 아픔과 절망 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조금씩 자란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살고자 하는 희망, 종교든 이념이든 국가든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는―그저 곁에 있는 이의 손을 잡고서 함께 살아가는 것. 수학여행을 떠나는 딸에게 눈물젖은 웃음으로 배웅하는 에스마와, 보스니아인인 엄마와 이름모를 세르비아 병사의 딸 사라가 조금씩 망설이다가 이내 환히 웃으며 친구들과 함께 아름다운 고향 사라예보 찬가를 부르는 것처럼. 2006. 10. 16. 2006/10/1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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