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 이 글은 드라마의 전반적인 짜임새나 의학적 사실의 충실한 재현여부를 논하는 글이 아닙니다(아니, 사극이면 혼자 책 뒤지면서 공부라도 할 수 있지만 의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 속 오류를 평범한 시청자가 어떻게 논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다고 그런 오류를 눈감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또 아니지만 말이죠). 오로지 이 글은 드라마 속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한 지극히 가벼운, 개인적인 느낌과 재미만으로 일관한 글임을 염두에 두시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따라서 당연히, 심도있는 분석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원래 갑작스런 버닝은 더 탈 거리가 나오기 전에 이처럼 하얗게 재로 만들어버려야 빨리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법이죠. -_-a;
1. 의사, 안중근입니다. (1화)
한국대학병원에 최연소 스태프로 소개되던 날, 서 과장의 권유에 마지못해 일어난 안중근이 딱 한 마디 던진 인사말이다. 의사라는 단어 외에는 달리 자신을 표현해야 할 말도, 또 그래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던 그가 총 18화 동안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이 글의 포인트라 하겠다(-_-;).
의사가 뭘 하는 사람인가. 사람을 살리는, 그리고 살려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극중 이건욱의 표현을 빌리자면―‘사람에게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칼을 들이댈 수 있는’ 외과의사다. 의사인 안중근은 아마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찾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그와 같이 일하는 선후배 동료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한 채, 오랜 시간 쌓여온 외로움과 어린 시절의 슬픈 기억은 속 깊이 묻어둔 채 오로지 의술 하나에만 매달린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안중근이다. ‘의사, 안중근입니다’이라는 이 대사는 드라마 전 회에 걸쳐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인 동시에 18화에서 봉달희에게 하는 대사와 연결된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의사 안중근으로만 존재했던 그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 [외과의사 봉달희]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나는 봉달희의 성장드라마인 동시에 안중근의 심리적 성장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1화에서의 저 대사가 그토록 내게 중요하게 와닿았던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저 대사 칠 때 목소리 톤이 진짜 좋았다;; ‘의사, (한 박자 쉬고) 안중근입니다.’ 착 가라앉고. >_<b
(물론 비현실적인 인물이란 건 안다. 그러나 이런 비현실적인 인물에 그 나름대로의 개연성과 설득력에 배우의 연기력이 더해지면 지금 나처럼 되는 거다. OTL)
2. 알았나 봉달희 선생? 네가, 그 환자를 죽게 했다. (2화)
뼛속까지 철저히 의사인 안중근은 제 아무리 앞뒤 모르는 초짜인 1년차라 해도 봉달희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가 봉달희를 매몰차게 몰아붙인 이유는 그녀가 의사로 제 몫을 완벽히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 대 인간, 남자 대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 대 의사로 마주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았고, 그렇기에 의사 안중근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봉달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1년차나 치프 선생들에게 대하는 쌀쌀맞은 태도와는 달리 동기인 조문경이나 병원에 입원한 후배 의사를 우연히 만났을 때의 그 표정을 떠올려 보라. 만약 그들이 안중근이 자신과 동등한 입장의 의사가 아니었다면―즉 실력이 밑바닥이었다면―절대 그렇게 편하게 대해주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그의 태도는 봉달희의 실력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아주 조금씩 바뀌어가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6화에서 봉달희와 그 어머니의 대화를 듣고서부터다. 이미 판막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의사의 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붙잡으려는 그녀의 절규를 들은 안중근은 그때부터 봉달희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의사가 될 싹수조차 보이지 않던 천지분간도 못하는 1년차가 아닌, 위험을 무릅쓰고 안중근 자신이 그토록 중시하는 의사의 길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욕을 품은 1년차 전공의 봉달희로 말이다. 이때부터 봉달희를 대하는 안중근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3. 넌 무식하지만 비겁하진 않았어. 사망자 컨퍼런스에서도 넌 끝까지 변명을 안 했어. 오늘도 넌 구구절절 말 한 마디 없이 이 자리에 섰어. 그건 쉬운 일이 아냐! 그러니까 비겁하게 공포와 두려움에 지지 마. 니가 지면 환자는 죽어! (8화)

"수고했어." 내 위에 이런 사수가 있다면 몸 바쳐 일하겠다(쿨럭);
6화에 이어 안중근이 의사로서의 봉달희를 다시 보게 되는 8화다(개인적으로 8화가 제일 재밌었다. 적당히 박력 넘치고, 적당히 긴장감 있고). 에이즈 환자를 수술할 때 잔뜩 겁에 질려있으면서도 봉달희는 제 몫을 다해 내고, 그런 그녀를 안중근은 새삼 다시 보게 된다. 연이어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응급수술에서 긴장과 부담감을 못 이겨 패닉 상태에 빠진 봉달희를 다그치며 전문의 안중근은 1년차 전공의 봉달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입밖으로 얘기한다. 의학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아직 형편없다, 그러나 너의 일에 대한 열정과 순수만은 인정한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안중근의 진심어린 질책과 격려에 힘입어 봉달희는 무사히 수술을 끝마치고, 연이어 자신의 혈액검사 결과에 자기 일처럼 흥분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안중근의 시선에 조금씩 사감이 섞이게 된다.

그러니까 이런 시선 말이지...
그러나 안중근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9화에서 이건욱이 봉달희를 만나러 온 것을 목격한 이후부터다. 그전까지는 분명 의사 대 의사, 전문의 대 수련의의 관계였으나 두 사람의 만남을 목격하고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희미하게 파랑이 일기 시작한다.
4. 기다려. 기다리라구. 기다려. (10화) / 그럼, 최선을 다한다고 언제나 좋은 결과만 얻을 줄 알았어? (11화)
10화의 저 대사는 진짜 간단하지만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다. 동건이의 죽음과 심장마사지 응급처치 후 사망한 환자에 대한 충격으로 병원을 뛰쳐나간 봉달희에 대한 염려와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뒤섞인 대사. 좋은 의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후배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 그리고 어느 새인가 마음 한 구석에 봉달희를 담기 시작한 안중근의 속내가 뒤섞이는 가운데 내뱉는 대사다. 10화의 사망자 컨퍼런스에서 그는 의학적 판단의 오류가 아닌 눈앞의 공포에서 도망치려는 태도, 의사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난관을 피해 도망가려는 봉달희를 나무란다. 조금씩 봉달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만 철저히 선배 의사의 입장을 유지하려 하는, 섣불리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겉으로 배어나오는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때가 이 무렵이다.
5.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금지)
9화와 12화에서 DNR 동의서를 제출한 환자를 두고 서로 상반되는 상황이 나온다. 9화에서 안중근은 송박사가 DNR 동의서를 제출했다는 이유로 이건욱이 CPR(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심폐소생술)을 시도하려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는데 12화에 이르러서는 환자가 DNR을 원했음에도 딸이 임종만은 지켜볼 수 있도록 심폐소생술을 해달라는 가족들의 애원에 CPR을 실시한다. 아마 이전의 안중근이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터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적·도덕적 판단은 뒤로 밀어두고 오로지 의학적 판단만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는 11화에서 봉달희가 칼에 찔리는 사고를 겪은 직후 지금까지 굳게 지켜오던 자신의 신념이 조금씩 변화해야 함을 느끼게 되고, 또 실제로 변화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부분이 12화의 CPR 장면이다.
6. 니가 이건욱이니까! (11화)

자기가 입밖에 내고서도 무지 부끄러웠을 거다;
천재 외과의로 인정받고 있지만 내심 이건욱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안중근이 치졸한 속마음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다 가졌고, 대학에 와서도 자신이 어릴 적의 진표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리고 지금은 봉달희와의 감정까지 한데 뒤얽힌 해묵은 감정. 그로 인해 그토록 중시하던 의학적 신념마저 순간 외면해버리는, 비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최고지만 어릴 적의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미숙한 감정을 적당히 포장할 줄도 모르는 요령없는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이건욱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가 좀더 섬세하게 묘사되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다시 봐도(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참 철딱서니없는 모습이라; 순진하다면 순진한, 그런 게 또 안중근의 또 다른 매력이긴 하지만.
7. 이미 난 오래전부터, 네 앞에선 벌거벗은 몸이다. 몰랐지? (17화)
솔직히 말해 처음엔 이 장면에서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 무슨 고백하는 대사가 왜 저리 변태같아;; ‘그럼 나도 내일 알몸으로 수술할까?’ 여기서부터 동생이랑 둘이서 (진지하다면 진지한) 고백씬 내내 데굴데굴 굴렀더랬다. 물론 그 의미는 충분히 전달된다. 봉달희도 안중근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이미 서로가 알아버렸고 숨기고 싶은 부분마저 죄다 들켜버린, 그래서 더 이상 숨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는 이에 대한 마음(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봉달희가 매번 남이 알면 곤란할 사실을 적절한 타이밍에 딱딱 맞춰 목격하지 않던가. 아님 귀신같이 안중근이 혼자 처박혀 있는 곳을 잘만 골라 짚어다닌다든가. 그 넓은 병원 안에서 거기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대;)을 표현하는 부분이니까. 아마 연기하는 배우도 이 대사를 어떤 식으로 소화해내야 할지 꽤나 고민하지 않았을까. 안중근답다면 다운 대사라고 하겠다(쿨럭). 적나라한 만큼 두 사람의 마음이 완벽히 화합을 이루는 장면이기도 했고.
8. 그 순간의 난, 의사 안중근이 아니라 남자 안중근이었어. (18화)*
바로 바로 요거다!! 만고 혼자 생각이긴 하지만 1화의 ‘의사, 안중근입니다’는 18화의 바로 이 대사를 염두에 두었을 거라고 생각한다(일단 서로의 마음을 알고 나더니 이 남자 거칠 것 없이 대놓고 이런 솔직한 말도 막 한다;). 언제나 철저히 의사의 입장에서 환자를 대하던 그가 처음으로 이성을 잃고 무조건 눈앞의 봉달희를 살리고 싶다는 개인적 욕망에 휩싸였음을 고백한다. 지금까지의 안중근의 변화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로 표현되었다면 18화에서는 스스로가 더 이상 예전처럼 의술에만 매달리는 완벽한 의사 안중근이 아님을 자인하는 셈이다. 13화에서의 ‘너 내가 남자로 보여?’ 이 대사와 같이 크로스되면 그 묘미는 120% 증가한다(푸하하하).
9. 걱정 마. 내가 꼭 아이 낳게 해줄 테니까. (18화)
사실 이 대사는 한편으로는 참 마음에 들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좀 아쉬움이 남는 대사다. 그 자신이 입양되어 자랐기에 굳이 봉달희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 해도 아이를 정 원한다면 입양을 해도 된다고, 그래서 듬뿍 사랑하며 키우면 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꼭 낳게 해주겠다’라니. 이건욱에게 ‘짐승도 제가 키운 새끼는 안 버린다’며 버럭 소리를 지르던 사람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온다는 건 지금까지의 안중근의 이미지와는 좀 거리가 있지 않은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였기에 소위 말하는 온전한 가족을 이루고 싶다는 마음이 크긴 컸을 거다. 봉달희 역시 어릴 적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에 가족의 따스함을 계속 원했을 테고. 18화의 울릉도 장면 중 안중근이 포장마차에서 어묵 꼬지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한참 주시하는 것을 보며 봉달희는 은연중에 그가 피로 이어진 ‘진짜 가족’을 무척이나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고,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은 것이겠지. 그런데 우리의 안중근, 어찌나 자신만만하신지. -_-; 게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드라마 막판에 이르러 봉달희의 은근한 프로포즈를 확실하게 받아치며 쐐기를 박기엔 저 대사가 사실 딱 어울리는 것도 사실이다; 버럭질만 할 줄 알았던 안중근의 또 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즐거운 장면. :-)
[er]만큼의 전문성과 긴장감, 그리고 탄탄한 짜임새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외과의사 봉달희]는 지금까지의 숱한 드라마들처럼 전형적인 멜로라인이면서도 캐릭터의 성격 변화를 무난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사라는 전문직을 다루면서 비교적 현장의 생동감을 최대한 살리려 한 노력도 엿보인다. 그러나 역시 이 드라마의 최대의 성과라면 순박함과 철두철미함, 냉정함과 끓어오르는 열정을 한데 품고 있는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를 제대로 구축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지닌 인력은 때로는 드라마 전체를 견인하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지. 해피엔딩, 해피엔딩. 요 몇 주간 당신 덕분에 참 즐거웠어요. 이젠 안녕, 안중근 선생님. :3
꼬리1>*저 장면에서 이범수가 ‘의사 안중근이 아니라…’라고 말할 때 나는 무심코 ‘남자 안중근이었어’라고 중얼거렸는데 똑같이 그 대사를 치는 거다. 이 얼마나 전형적인 캐릭터인가!!(으하하하) 어쩜 그리 예상한 대로 나가는지;
꼬리2>사실 11화에서 봉달희가 칼에 찔리는 그 순간 동생과 나는 똑같이 입밖에 내어 말하고 말았다. ‘웬 [er]?’
...혹시 저 장면에서 저 같은 말 내뱉은 사람 또 없나요?? (미리 밝혀두지만, [er]의 그 사고 ―6시즌 13, 14화 ―와 [외과의사 봉달희]에서의 사고는 병원에서 환자한테 찔린 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내용 진행상의 유사점은 없습니다)
꼬리3>그래도 드라마니까 저런 프로포즈가 먹히는 거지 실제로 ‘내 아를 낳아도’ 뉘앙스의 프로포즈는 정말이지 최악이다. -_-++
꼬리4>그 외에 생각나는 대사라면 '괜찮아? 그럼 됐어.(11화)'(으아 이때 표정 정말 장난 아니었지. 숨 몰아쉬는 거 하며;)랑 '...밥 먹어.(11화)'/'마셔.(14화)' 푸하하;;;;;;;
//22:10 추가!!
그 울릉도에서 어묵 먹던 애들 안중근이 쳐다보는 장면, 배고파서 쳐다본 거였단다. SBS 홈에서 200원 주고 대본 본 동생의 증언.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