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나라-무휼] 2007년 5월 12일 1회/2회 [창고/무대 위의 향연]원작·1차 각색: 김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물론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뇌는 있다. 그러나 그 고뇌를 본인이 표현하지는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는 철저히 왕으로 남아있어야 하고 그가 지닌 고민과 아픔은 그를 따르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된다(해명: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세류: ‘나의 왕, 어깨를 펴세요.’).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가지 않았어도 되었던 부도로의 길, 왕으로서의 길을 가야 하는 데에서 오는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은 일곱 살 어린 무휼일 때 이미 끝냈던 것들이다(‘더는 약하기 때문에 잃고 살지 않겠다.’). 그는 자신이 왕임을 고민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많은 목숨들의 무게를 지고 제 손을 피에 흠뻑 적시더라도 왕이기 때문에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은 왕이십니다. 그리고 왕이셔야 합니다. 혜압이 말한다. ‘그가 옵니다. 고구려의 왕!’ 그 자신이 왕임을 의심하지 않기에 혜압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며 명림의 군사들을 그에게 내주고, 해명태자는 죽어 그의 머리 위에 실리며, 괴유는 천년에 천년을 거듭하여 살 수 있는 생명을 내맡기고, 호동은 그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왕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해야 하는가? 왜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반문해야 하는가? 의심을 했으면 다시 왕으로서의 자신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의문은 의문 그대로 남긴 채 그는 다시 부도로 향한다. 아니, 향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관객들은 느낄 수밖에 없다. 무휼이, 그리고 [바람의 나라-무휼]이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전장에서 부르는 무휼의 노래는 왕인 그를 위해 싸웠던 병사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어버리고 왜 괴유와 마로와 세류와 해명태자가 ‘이런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운명을 걸었는지에 대해 관객들이 의심하게 한다. 1막에서부터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왕인 무휼을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극의 중심에서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왕인 무휼이 흔들리자 공연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12일 1회 공연 때 명림숲에서부터 ‘죽여, 죽여, 죽여….’를 외치는 혜압의 대사부터 어딘가 힘이 빠져있다고 느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느려진 듯한 템포, 결코 넓다고는 할 수 없는 토월극장임에도 무대 위의 열기가 관객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만이 그렇게 느슨해지고 힘이 없어진 게 아니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지고 힘이 빠진다. 왕으로 걷고 움직여야 할 무휼의 움직임 역시 그냥 정해진 안무와 동선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아마 내가 2006년도의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설명할 수 없는 맥빠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층 객석에서도 손발이 절로 떨릴 정도로 느낄 수 있었던 무휼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해명태자의 힘을, 혜압의 진중함을 이미 온몸으로 경험한 나로서는 2007년의 이 느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충분히 그 아우라를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는 배우들이 바뀐 연출 때문에 스스로 자기 존재감을 억누르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니!!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는지 올해 공연에는 몇몇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무휼과 이지의 첫날밤, 그리고 배극의 죽음이다. 먼저 무휼과 이지의 경우, 지나치다. 만약 막공에서 그랬다면 팬서비스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다. 유혹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면 ‘조금만 더’라며 아쉬움을 남기는 순간 멈추었어야 했다. 2006년 공연에서 절제된 분위기 가운데 상징적인 안무로 첫날밤의 상황을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그냥 ‘대놓고’ 보여준다. 첫날밤의 무휼과 이지는 남자 대 여자가 자아내는 긴장감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다르기에 빚어지는 정치적 대립각을 연출해야 함에도 직접적인 베드신으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죄다 없애버리고 만다. 배극의 등장 역시 작년과 비교하여 대사와 연출이 상당히 바뀌었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수식이 많고 길다는 느낌이다. 만약 작년처럼 공연 전체의 긴장감이 상당히 높은 상태라면 배극의 죽음이 한 박자 쉬어가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극의 흐름을 한층 더 늘어뜨리는 데 일조를 하고 있을 뿐이며 가사의 전달력도 확연히 떨어진다. 연의 노래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2006년 연의 노래에 비해 올해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결론은? 연의 의지 역시 그 부드러움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호동에 대한 연의 사랑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해명태자의 혼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을 지키려 했던 연의 확고한 이미지는 한없이 약해져버렸다. 아마 작년의 연(유나영)의 노래가 상당히 강했다는 의견들을 의식한 데서 나온 변화인 듯 한데, 이는 연을 누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변화를 줄 수 있었을 부분임에도 굳이 노래를 바꾸면서까지 연의 캐릭터를 변화시켜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의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에 새로 바뀐 호동 얘기도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호동은 나어린 아이가 맞다. 그러나 신수인 봉황을 맞아들이고, 성장하고, 왕 무휼과 대립한다. 비록 온유하고 심약한 부분도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약한 자는 왕이 될 수 없다.’/칼자루를 바꿔 쥐는 장면) 어린 호동 역시 자신만의 의지와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12일의 호동은 호동으로서의 의지가 없었다. 배우의 연기가 나쁜 것도 아니요, 노래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아이였을 뿐, 호동은 아니었다. ‘푸른 하늘 저 부도로’라며 손을 뻗는 그 장면은 호동의 의지가 담긴 외침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호동을 그저 아이로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챙, 하고 긴장감을 이어 끝까지 올라가주어야 하는 ‘저 부도로’에서 1회, 2회 두 번 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OTL
![]() 고맙습니다. 온몸으로 [바람의 나라-무휼]을 표현해주신 분들. 그래도 올해 공연을 보며 위안을 얻은 게 있다면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멋진 안무다. 작년과 비교하여 더욱 섬세하면서도 박력을 겸비한 앙상블이 전해주는 그 감동이란! 비록 (윗 단락에서 언급했다시피) 음악 때문에 그 감동에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왕의 전쟁을 온몸으로 나타내준 분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부디 막공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가희와 이지의 표현력도 한층 깊어졌다. 특히 긴 휘장을 다루는 이지의 팔의 움직임은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가희는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우리 (완소) 가희 어떡해~.’라는 심정으로 불안해하며 보았지만 대사를 칠 때의 완급 조절이나 노래는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청룡의 표현 역시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다. 올해의 청룡은 긴 소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는데 이쪽이 더욱 청룡의 움직임에 걸맞아보였다. 나머지 신수의 경우 무휼을 따르는 세류, 해명태자, 괴유가 자신의 신수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뒤의 스크린을 활용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더하는 부분도 상당히 멋졌다. 또한 호동이 칼을 쥐고 장난치다가 처음엔 칼자루를 쥔 상태에서 바닥에 내리꽂으려다 방향을 고쳐 칼자루로 바닥을 내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작다면 작은 부분이지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호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12일 공연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산호 괴유의 발견이다. 사실 작년의 김산호가 연기한 무휼은 고영빈 무휼에 비해 카리스마가 많이 약했고, 이번 공연에서 내심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가희와 함께 등장하는 순간 흠칫 놀랐다. 괴유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사를 칠 때의 호흡과 발음이 아직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괴유를 소화해내기 위해 배우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산호 괴유는 물론, 김산호라는 배우가 연기할 미지의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기대를 품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대무신왕 무휼.
2007. 5. 14. 2007/05/14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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