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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그 꿈이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혹시나 잠결에 그녀가 발을 헛디딜까봐 노파심에 켜놓은 침대 옆 미등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미등이 뿌려대는 약한 빛만으로도 네모난 천장, 자잘한 돋을새김 무늬가 뿌려진 크림색 벽지, 심플한 모양의 원형 벽시계, 그의 감색 블레이저 재킷과 그녀의 베이지색 점퍼가 걸려 있는 옷걸이, 그녀의 화장품 몇 가지와 약이 놓여있는 베드테이블의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부러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어깻죽지에 와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자신의 팔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올려져 있었다. 따뜻했다. 그녀가 곁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했다.
위도, 아래도, 왼쪽도, 오른쪽도 구별할 수 없는 마냥 새카맣기만 한 공간.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정적. 마치 심연우주(深淵宇宙), 중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우주공간이 주는 느낌이 바로 이럴까.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정작 어디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자신,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는 것. 한번 풀쩍 뛰어올라 물구나무를 서면 하늘과 땅이 바뀐다. 뱅그르르 180도를 돌면 왼쪽과 오른쪽이 바뀐다. 이쪽이다, 라고 정해놓아도 비스듬히 3차원적으로 몸을 기울이면 기껏 익혀놓은 위/아래/좌/우/는 모두 뒤집혀버리고 만다.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표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빛도 소리도 끝도 없이 무한대로 펼쳐진 공간. 눈을 감고 있으면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발을 적시고 다리를 타고 올라와 심장에 머무르며 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채우고 숨길을 막고 머리끝까지 흘러들어와 그를 집어삼킨다. 간신히 입밖으로 흘리던 신음소리마저 어둠에 완전히 잡아먹혀 버린다.
그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누구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에도 누구 하나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자리걸음을 하든, 앞으로 달음박질을 치든, 심지어 뒷걸음질로 물러설 때에도 누구 하나 그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아―.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외마디 신음을 삼키며 그는 혼자 걸었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실제로 닿기도 했다. 걷다보니 손에 쥐고 싶은 것들도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뛰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역시 없었지만, 그는 혼자 찾아서 걷고 뛰었다. 조금씩 그런 과정에도 익숙해져갔다. 그래서 손에 넣고, 무언가를 이루기도 했다.
―기쁜가?
그런 것도 같았다. 살짝 웃음을 지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가 손에 넣고 해낸 것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았다. 때로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자신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게 바로 이걸 위해서였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웃음을 뒤로 하고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며 웃었다. 덩달아 그도 조금씩 웃게 되었다.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행복이란 건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탐내려 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피로에 잔뜩 젖은 자신의 손을 누군가가 따뜻하게 쥐어주기를, 환자의 피냄새에 잔뜩 취해 있는 자신의 이마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쓸어주기를 바라본 적도 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기에 금방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냥 아주 조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올 뿐.
그러나 그 꿈을 꾸고 난 날이면 어김없이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끌려들어만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지만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변함없이 혼자인 것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두려웠다. 몇 번을 둘러봐도 혼자였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가운 부름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한 마디면 되는데, 정작 그의 이름 석자를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날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보아도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어둠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대체 어디냐고,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어둠 속을 빠져나갈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만 가보아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음으로 그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암흑 속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말하고 기댈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의 심연 속에 발을 들일 때까지는.
“…우웅, …선생님…?”
이마에 달라붙은 갈색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손길에 잠이 깬 모양이다. 잔뜩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다시 품안으로 파고들며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세게 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은 연약한 팔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그를 자신에게 얽어놓으며 그녀는 잠결에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치며, 그는 간밤에 달뜬 숨을 삼키면서 그리도 애타게 연거푸 자신을 부르던 그녀의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어. 더 자.”
“으응….”
지금도 그는 그 꿈을 꾼다.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 있는 별 하나 없는, 공기의 흐름마저 멈춰버린 절대고독의 어둠. 지금 딛고 서 있는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고 좌우를 짐작할 수 있는 기준점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넓고 깊은, 어딘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여전히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도 언제 어디에 있든 간에 결국에는 닿을 곳, 닿아야만 하는 곳이 생겼다. 생전 처음 그도 남들 같은 행복을 꿈꾸게 되었고 마음속에 소중히 품을 이름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있기에 그는 이제 길을 잃지 않는다. 그만의 절대좌표, 움직이지 않는 등대. 온몸을 적시고 숨통을 죄어오며 평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암흑 속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단 한 사람.
“웅…같이 가요….”
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무슨 꿈을 꾸는지 계속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그녀를 다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래, 이제 괜찮아. 끝이 없는 어둠을 보았기에 네가 품은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으니까.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겪었기에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누구보다도 잘 들을 수 있으니까. 차갑게 온몸을 타고 도는 지독한 외로움을 알기에 내 손을 잡는 너의 손이 얼마나 따스한지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네가 있기에 나는 방향을 잃지 않아. 네 덕분에.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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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라는 표현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엑파 7시즌 중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디시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5-16 23:47:12, Est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