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참 진짜…쪼, 이제 기분 풀어라. 엉?”
“이게 지금 그런 걸로 풀릴 문제야? 언제까지 그렇게 어머니한테 휘둘리면서 살 거냐고!!”
“그래. 니 말 맞다. 근데 안 있나…그래도 엄만데 눈 딱 감고 등 돌리고 살 수도 없는 거 아이가.”
“그럼 앞으로도 계속 어머니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렇게 살 거야? 정작 박 선생은 어머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조아라. 니 내 사랑하재?”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니를 사랑하는 내도 내고, 우리 엄마한테 맨날 지는 내도 내 아이가. 니한테는 그 둘이가 다른 사람이가?”
“…박재범.”
“니 말 다 옳은 거 안다. 그래도 우짜노. 니를 사랑하고 니가 사랑하는 내도 내고, 맨날 애먹이는 우리 엄마, 그래도 엄마라고 신경 쓰이는 것도 낸데. 그래, 이제 이런 일 있으면 조 선생한테 먼저 의논하고 할게.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둘이서 머리 맞대고 같이 하자 해놓고 내 맘대로 한 내 잘못, 맞다. 내 인정한다. 그라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라.”
“…몰라, 몰라, 이젠 나도 몰랏!!”
“에이, 왜 이러시나 우리 싸랑하는 올리브~.”
“맨날 곤란해지면 사랑, 사랑…. 그거면 다 되는 줄 알아??”
“어? 그라면 우리 올리브는 내 사랑 안 하는가? 그런 거가?”
“아휴…정말 내가 못 살아!! 그래 사랑해, 사랑하니까 앞으론 제발 그런 바보짓 좀 하지 마. 알았어?”
“올리브으으~~.”
―여기까지.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올라온 옥상을 먼저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그와 그녀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이제 내려가야 할 타이밍임을 확인한 후 다시 살며시 옥상을 빠져나왔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박재범, 의왼데. 멋진 구석이 있어.”
“그러게요.”
늘 장난기 가득한 박재범만 봐오던 그들은 조 선생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진지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고서 새삼 놀라고 있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늘 똑 부러지게 자기 할 말은 또박또박 하던 철의 여인 조아라가 박재범 앞에서는 저렇게 물러질 수 있다는 것에도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여튼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저러는 걸 보면 정말 서로한테 딱이다 싶단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그들의 머릿속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혹은,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
“정말??”
“으응….”
안 선생님이야 그렇다 쳐도 그녀마저 아직까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누가 뭐라 해도 천하의 오지랖 99단, 옆 사람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한번 마음먹었다 하면 죽어라 한 우물만 파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럼 두 사람, 대체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누군가 좋아한다는 말은 했으니까 시작한 거 아냐?”
“그냥…이렇다 할 고백 같은 건 없었구…. 선생님이 고백 비슷한 건 한 적 있어.”
“뭐라고 하셨는데?”
“음…내가 아이 못 낳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걱정 말라고…. 선생님이 꼭 낳게 해주겠다고….”
아이고 두야, 내가 지금 30대 중반 남자와 20대 후반을 지나 이제 막 30대로 진입한 여자의 연애담을 듣고 있는 거 맞아? 세상에 무슨 사랑 고백을 애 못 낳을지도 몰라 미안하다고 하고, 애 꼭 낳게 해줄 테니 걱정말라 하고…. 좋으면 좋은 거지 거기서 애 얘기가 왜 나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누가 들을까 무섭다 무서워. 조아라는 두 사람밖에 없는 좁은 당직실 안을 불안스레 휘휘 둘러보았다.
“먼저 말하지 그랬어?”
“그게…두려워.”
“에?”
진작에 다 아물고도 남았을 가슴팍의 흉터에서 묵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랑. 길거리의 그 수많은 가게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절반이 사랑에 웃고 나머지 절반이 사랑에 우는 노래들인데 그녀에게는 그 말이 참으로 어렵고 무서웠다. 입이 닳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입에 올리며,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녀의 블라우스 옷깃을 거칠게 풀어헤치던 남자는 그녀의 흉터를 보고 흠칫 손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더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리께를 휘어잡던 남자의 손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그녀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생채기를 깊숙이 남기고, 살갑게 속살대던 뜨거운 목소리는 얼음장으로 돌변해서는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얼리고 쪼개버렸다. 그저 마냥 달콤할 줄로만 알았던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두렵게 되어버린 것은.
“그냥, 나는 그래. 좋아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편하고 좋아.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은 익숙해지면 참 좋지만…익숙해질수록 참 겁나는 말이거든.”
“무슨 뜻이야, 그게?”
“얘기…했던가? 나, 전에 사귀던 사람, 결혼까지 하려던 사람 있었다고.”
나이가 나이니만큼, 게다가 그 푼푼한 오지랖을 생각하면 그 흔한 연애경험 한번 없을까마는 차분한 말끝에 묻어나는 습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에 조아라는 숨을 죽이고 듣기만 했다.
“그 사람이 늘 그랬어. 매일 볼 때마다 사랑한다고, 정말 하루도 잊지 않고 말했었거든.”
“…좋았겠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한다던 사람도…내 가슴의 수술자국 보고는 그냥 아무 말도 않더라. 입 딱 다물고 눈 딱 감고 말더라고.”
“…….”
“그리고는 내 친구랑 그렇고 그렇게 되어버렸지. 다 지난 얘기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며 조아라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착잡해졌다. 바보야, 아무한테나 웃음주고 마음주니까 혼자서만 다치는 거야. 그렇게 남한테 퍼주기만 해서 어떻게 살아. 그렇게 순하고 착하게만 남들 대해준다고 모든 사람들이 너한테 똑같이 대해준다는 법이 어디 있어…. 평소처럼 다다다다 쏘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입가에 머금은 그 미소가 처연하기까지 해서 그만 입을 다물고 손 한번 잡아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그런가…. 난 사랑한다는 말,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이젠 조금 무서워. 예전처럼 무턱대고 용감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나 온 마음을 담아서, 떨림을 애써 감추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겨우 속삭일 수 있었던 그 말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바람결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진심이 아니면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다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생각했던 그 말이 순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한낱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낱말은 옛날의 그 남자가 밥, 담배, 커피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하던 사랑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훨씬 무겁고, 진솔하고,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게 두려웠다. 그의 고백 앞에서 지난 일을 떠올리지 않고 순수하게 기뻐할 자신이 없었다.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 그리도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온몸으로 깨달아버렸으니까.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한다는 걸,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러니까…난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괜찮아. 말은 안 해도 선생님이 날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나도 선생님 많이 좋아하고…. 그냥 그걸로도 족해. 굳이 사랑한다는 말 안 해도 상관없어. 그런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걸.”
“그런 게 어딨어? 말로 듣는 거랑 그렇지 않은 거랑은 분명히 다르잖아.”
볼멘소리로 툭 내뱉는 아라의 반문에 글쎄, 하며 그녀는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영원을 약속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영원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서도, 예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그 고백의 빛을 순식간에 꺼뜨릴 지도 모른다는 게 무섭다는 것을.
******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와 마주친 조아라는 꾸벅 목례를 하면서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회진이며 수술 스케줄도 끝낸 것을 확인했으니 지금은 아마 자신의 연구실로 가려는 것일 게다. 뒤따라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으려니 그가 무슨 용무냐는 듯 슬쩍 안경 너머로 시선을 건넸다. 아…조아라, 많이 변했다. 남의 연애사에 훈수까지 두게 되다니. 이게 다 오지랖 넓은 그녀와 엮인 탓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어쩌나. 가만 두면 잘 가다가도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툭 돌부리에 채어 넘어질 것만 같이 순해빠진 사슴눈을 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뭐라도 하나 더 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안 선생님.”
“―왜?”
우와, 봉하고 사귀고 나서는 좀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저 박력만큼은 여전하시단 말야.
“죄송하지만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봉 선생에 관한 일입니다.”
“뭔데?”
조아라가 무엇 때문에?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봉 선생, 사랑하시죠? 그냥 가볍게 좋아하시는 거 아니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언제 오지랖이 법정 1군전염병으로 되었던가? 동기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렇겠거니 하고 듣고 넘기기엔 이건 좀 심하다. 그녀와의 관계를 일일이 조아라에게까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감히, 이 내가, 그녀를 대하는 마음이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런 감정으로 보였단 말인가? 그는 안경을 재차 고쳐쓰며 조아라를 쏘아보았으나 상대방 역시 만만찮은 성격인지라 그의 시선을 지지 않고 맞받아쳐냈다. 후우…아무래도 이 친구한테는 일일이 설명해줘야 할 모양이다.
“내가, 봉 선생 대하는 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나?”
“모르죠.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까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거잖아, 그런 건.”
“봐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로 확신을 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말’의 중요성을, 그 힘을 간과하곤 한다. 그저 속에 품고만 있으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말을 통해 더욱 공고해질 수 있고 그 효력의 유예를 한참은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이심전심, 심심상인, 염화시중…. 뜻이야 좋지. 그치만 말 안 해도 알면 다 부처님이고 돗자리 하나 펴고는 점쟁이라도 되게?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그를 보며 조아라는 태어나서 처음 발휘해 본 오지랖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경험이란 걸 깨달았다.
“입 밖에 내기 전까지는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고 바람일 뿐이죠. 말로 상대방에게 전달해줘야 비로소 변하지 않는 진실이 되는 게 아닐까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조아라는 숨을 한번 크게 삼키고 곧이어 세차게 몰아칠 반격을 두 눈 딱 감고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7, 8, 9, 10, 11…. 숫자판에 번갈아가며 불이 들어오는, 짧다면 짧은 몇 초 동안 내심 초조해하며 기다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딩, 소리를 내며 문이 스륵 열리고 먼저 내려야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한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조아라의 옷깃을 잡아챘다.
“조아라 선생. 지금 바쁜가?”
“네? 아…괘, 괜찮습니다!!”
어금니 질끈 물고 각오하고 있던 호된 반박 대신 그녀가 없을 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앞에서 순간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만 조아라를 보며, 그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따라와. 내 특별히 조 선생한테는 ‘눈으로’ 확인시켜 줄 테니까.”
******
“선생님!!!”
숨이 턱에 닿도록 헐떡이며 그녀가 연구실 안으로 냅다 뛰어 들어왔다. 이거야 원, 너무나 예상대로인 반응이긴 했지만 역시 저렇게 새파랗게 질린 모습은 가급적 안 볼 수 있다면 안 보는 게 좋은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리고 그렇게 뛰어다니지 말랬지!”
“선생…님, 어디, 아프신 거…아니죠? 그쵸?”
“왜 그래?”
“아니…조 선생이…선생님…MRI 찍으셨다고…어디 안 좋으신데 있는 거 아니냐고…”
이것 참. 좋아하면 서로 닮는다더니 박재범이나 조아라나 똑같구만. 눈치 하나 빠른 거야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는 입가로 비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냉랭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하는 김에 심장초음파도 해봤어. 정상은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직접 한번 봐.”
그가 몇 장의 사진을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들고는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채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선생님…모르겠어요…. 어디가 이상한 건지…아이 참…돌대가리라서 그런가…. 다 괜찮은데…빨리 말해봐요 선생님,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다그치듯이 몰아붙이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좀 지난 일이긴 했지만 그녀 때문에 혼자 속절없이 끙끙 앓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여유야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유도 잠시, 그녀는 그예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고, 놀란 그가 그녀를 황급히 안아 일으켜 세웠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훌쩍)모르겠(딸꾹)어요…어쩜 좋아….(딸꾹) 다 정상인(딸꾹) 것 같은데…뭐예요, 네?(훌쩍).”
눈물, 콧물도 모자라 딸꾹질까지 해가며 매달리는 그녀 앞에서 그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이제 장난도 한번 제대로 못 치겠구나. 아무리 가벼운 장난이라도 그녀 눈물 한 방울에 정말 멀쩡하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니…. 금세 흠뻑 젖은 얼굴을 재차 쓰다듬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입술로 훔쳐내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품에 안고 토닥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세차게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가 그나마 조금 가라앉는 듯 싶자 그는 다시 사진을 보여주며 조용히 말했다.
“잘 봐…한참 들여다보면 보일 거야. 안중근 심장이 봉달희 거라고…. 안중근 머릿속에 봉달희 밖에 없다고….”
그녀가 여전히 눈물이 고인 두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의 말을 채 다 이해를 못 한 듯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젖은 눈자위와 하얀 뺨과 도톰한 아랫입술에 차례차례, 경건한 마음으로 입맞춤하며 그는 지금껏 아끼고 아껴두었던 그 한 마디를, 언젠가는 꼭 해주리라 생각하며 묻어놓았던 그 말을,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상대가 그녀임에 감사하며 속삭였다.
“그래. 나 안중근이, 너 봉달희를, 사랑한다고….”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애써 잊을 수 있을 거라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건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그 남자의 가볍기 그지없었던 사랑고백이 생생히 떠올랐다. 거칠게 옷 안을 헤집다가도 흉터 자국 위에서는 흠칫 멈춰버리던 손, 마음이 아닌 금방 소모될 욕구를 위한 메마른 고백에 서걱서걱 베여지던 상처를 속절없이 혼자 끌어안아야만 했던 숱한 밤들이 하나 둘씩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결국은…생각이 나버리는구나.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그의 고백을 듣고서야 그녀는 진심어린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눈물이 가시지 않은 자신의 눈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그의 까만 두 눈과, 섬세한 크리스탈을 어루만지듯 얼굴을 부드러이 감싸고 있다 다시금 목덜미로 내려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는 그의 따스한 손과, 다시는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자신의 품안에 끌어안고 있는 강인한 팔과, 그녀 가슴속의 시계소리와 함께 박자를 이루며 뛰고 있는 그의 힘찬 심장 고동.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 해묵은 상처 위에 하나씩 내려앉으며 마지막 얼음 한 조각까지 모두 녹여내었고, 다시 두 뺨 위로 반짝이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옛날의 그 남자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그 남자 때문에 흘린 눈물이 수십 바가지고 무색이라 영원하다던 그 잘난 우정마저도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지만, 어찌 되었건 그 남자 덕분에 진짜 사랑이 어떻게 다가와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진심어린 고백은, 그토록 잊고 싶었지만 앙금처럼 가라앉아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억 위에 촉촉한 봄비처럼 스며들어 온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어루만지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이라면 그녀도 얘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동안 숱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바보같이 옛일에 얽매여 전하지 못 하고 속으로만 삼키던 그 말을.
“그냥…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냥…내 안에, 선생님으로 가득 차버려서…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래, 이제는 그 어느 것에도 내어줄 틈이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로 가득 차버려서 도저히 입 밖에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
“저도요…. 저 봉달희가, 안중근 선생님, 사랑한다고….”
그래서일까, 그녀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지난 시간은 쓰디쓴 추억과 아픔만 남긴 게 아니라 그녀가 진짜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심안(心眼)과, 다시금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니까. 함께 이마를 맞대고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짧은 한 마디를 가득 담게 되었으니까. 화악 더워져오는 가슴, 깊게 얽혀드는 시선, 깃털같이 살풋 내려앉는 입맞춤, 주고받는 호흡―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기꺼이 자신을 묶어두기 위한 영원의 주문을.
“사랑해.”
“…사랑해요.”
FIN.
===============================================================================
1.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올린 단편들 중 ‘아침식사’를 제외하고는 다 제목이 두 글자씩 되버렸는데 딱히 의도한 건 아님.
(이참에 ‘아침식사’ 제목도 ‘조식’이라고 바꿔버릴까.)
2. 사실 드라마나 영화니까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어디 쉬운가? 입에 잘 익지도 않고, 뭐랄까 ‘좋아한다’라는 말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니까. (게다가 안쌤이 연애에 있어서는 좀 많이
초딩서툴어야 말이지.) 사랑한다는 고백도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길게 늘여본 잡문.
이젠 정말로 밑천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달달한 거 쓰래도 못 하겠다. 어차피 달달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단어라. -_-;
3. 말은, 중요하지. 그럼.
(디시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6-11 09:52:00,
Est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