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오브 라만차(2007)-2007. 10. 20. 19시 울산 현대예술관 [창고/무대 위의 향연]주연: 정성화(세르반테스/돈키호테) ![]() 2005년도에 [돈키호테-라만차의 사나이] 공연에 대한 이런저런 감상문을 찾아 읽으면서 ‘또 좋은 공연 하나를 놓쳤구나.’라는 생각에 속절없이 찬물만 계속 들이켰던 기억이 난다.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맨 오브 라만차]라는 제목으로 찾아온 이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울산 공연이 일주일만 빨랐어도 보지 못했을 거고, 일주일만 늦었어도 이제 주말마다 회사에 매인 몸이 되어 결국 블랙커피만 들입다 마시면서 울분을 토했을 게 뻔하니까. 2005년에 이은 재연, 그리고 서울에서의 한 달여간의 공연기간을 거친 덕분인지 공연 내내 전체적인 짜임새나 분위기가 매우 안정된 느낌이었다. 배우들끼리 대사/노래를 주고받는 리듬감이나 무대 전체적인 동선 역시 어느 하나 차고 기움이 없었고, 상당히 어려운 노래들이 많았는데도 듣기에 크게 부담이 없었다. 특히 노새끌이들의 힘찬 앙상블은 노래만 들으면 굉장히 강렬한 느낌인데도 막상 무대 위에서는 전혀 튀지 않고 잘 녹아드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돈키호테를 연기한 정성화의 목소리를 들은 첫 느낌은 바로 ‘성실하다’라는 것. 그 정도로 음색이 침착하고 부드러웠기에 돈키호테의 광기보다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꿈을 잃지 않으려하는 세르반테스의 올곧음이 더 잘 어울리는 듯도 싶었다. 군데군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의 음색이 살짝 섞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소리 자체의 믿음직함이 참으로 인상적. 공연을 보고 난 후에야 미리 사두었던 [맨 오브 라만차] 2CD 중에서 조승우/김선영 캐스팅의 첫 번째 CD를 들었는데 (비록 공연을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편견일 수도 있으나) 조승우의 목소리가 정성화의 목소리에 비해 더욱 극적이고 과장된 듯한 느낌이었다(특히 대사 자체의 표현력은 조승우가 한 수 위인듯). 아마 관객들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에 서로 다른 캐스팅을 고루 관람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남는다. 돈키호테만큼 중요한 역인 알돈자의 경우 노래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데 놀랐고 그 어려운 노래들을 윤공주가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해낸다는 데에 또 한번 놀랐다. 그럼에도 (가성으로 커버하는 부분도 있지만 때로 진성으로 팍 내지르는 부분 역시 있는데) 간간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에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사를 칠 때의 목소리는 닳고 닳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인지 거칠고 허스키한 음색인데 막상 노래는 굉장히 높은 음역까지 올라갔던 것. 어떨 땐 악을 쓴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라고나 할까. 어지간한 음역이 아니고서야 알돈자의 노래를 완벽히 소화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듯 싶었다. 다만 알돈자라는 인물이 굴곡많은 삶에 한껏 찌들어 지친 캐릭터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오히려 그 점을 역설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아쉬움은 살짝 접어두기로 했다. 산초를 연기하는 이훈진이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내심 속으로 ‘정말 산초구나!’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산초라는 캐릭터가 어느 정도의 전형성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익살맞으면서도 순박하고, 적당히 요령을 피울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충직한) 저렇게 외모부터 너무나도 산초 그 자체일 수가 있다니! 프로그램을 보고서야 산초도 더블캐스팅인 걸 알게 되었는데(울산 공연은 정성화/이훈진 콤비였다) 프로그램에 실린 사진만으로도 이미 내 마음은 이훈진 산초로 낙점(이러면 안 되는데-_-). 단지 공연에 몰입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도 산초에게 시선이 머무는 순간 절로 소리없는 웃음이 새나온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정성화의 강직한 음색과도 상당히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특히 ‘좋으니까~’라며 몸을 모로 꼬는 장면은 그야말로 최고. 주연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바로 안토니아와 가정부, 신부, 그리고 닥터 까라스꼬의 성격을 체스판의 말에 빗대어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체스의 룰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무대 위에서 등장인물들의 3차원적인 움직임이 서로 교차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각각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무대 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시각적 효과와 함께 대사가 더욱 힘있게 와닿을 때의 그 기쁨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느끼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점이 실황CD가 아닌 공연장에서 배우들과 함께 하는 관객들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라 할 것이다. 꿈은 아름답지만 때로는 지독히도 잔인한 법이다. 그러나 현실은 때로 꿈보다도 더 잔인하다. 처절한 현실은 몸과 마음을 찢어발기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때로는 죽음을 갈구하게까지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발붙이고 숨을 쉬고 있는 것은 꿈이 아닌 현실. 꿈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것, 현실을 꿈으로 끌어올리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민하는 것…. 과연 어느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지,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고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돈키호테는 꿈을 꾸며 죽었지만 세르반테스는 막막한 현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가, 그리고 알돈자가 다시 일어나 노래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덧없어보이는, 이룰 수 없는 꿈. 꼭 이루어서 현실로 만들지 않는다 해도 그저 그 꿈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한…. 그래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는 세르반테스의 등이 그렇게나 힘겨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없이 가슴 벅차게 다가왔나 보다. 꿈과 이상을 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면, 우리 모두는 유죄. 그러나 어쩌랴, 그 죄가 바로 내일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을. 현실 속의 상처로 온통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 위에 꿈의 잔해가 흩뿌려질 때, 어쩌면 그 한 순간을 위해 이토록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알돈자와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처럼.
꼬리1> CD에는 ‘슬픈 표정의 기사’라고 되어 있는데 공연에서는 ‘슬픈 수염의 기사’라고 들었다. ‘슬픈 수염’이 더 멋지고 좋은데. 2007/10/28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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