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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有罪) [일상/보고, 듣고, 느끼다]

명실상부하다 강간의 왕국-쓴귤 님
고속터미널에서 희롱당하고 니킥 못 날린 얘기-뮤리 님

생각해보면 이 나라에서 여자로 만 2*년 동안 살아오면서 험한 일 별로 안 겪고 지금까지 지낸 것만 해도 더없는 행운이요 축복이라 하겠다. 여자라서 정말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싶은 일도 비교적 적다면 적은 편이다. 늦은 여름밤 술이 취해 49-1 막차의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떴더니 무릎 위 올려놓은 가방 틈새로 옆자리 남자의 손이 내 허벅지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든가. 버스 좌석에 앉아 있는데(실수였는지 어땠는지 모를 일이지만) 버스 손잡이로 가야 할 남자의 손이 내 목덜미를 스르륵 훑고 지나갔다든가. 타과 수업을 듣는데 내 레포트를 눈여겨보았다는 말과 함께 프린트물을 넘겨주며 손목 위 팔뚝까지 만지고 사라지던 교수도 있었다든가. 무거운 캐리어에 가방까지 이고지고 이제 막 내리려고 지하철 출입문 앞에 섰는데 웬 나이든 영감님이 겨드랑 사이로 손을 불쑥 넣어 내 가슴을 만지고는 후닥닥 내리는 바람에 너무 놀라 주저앉은 채 결국 종로3가서 내려야 할 것을 종로5가까지 가서 내렸다든가. 그래, 이 정도면 정말 적은 편이요 참으로 곱게, 무사히 지낸 편이다. 그 어린 나이 때부터 차마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을 당하고도 침묵해야 했던 이들도 있는데 그들의 아픔에 비하면 내가 겪은 일쯤이야 뭐 대수라고. 다만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어떻게든 남자들 몸에 안 닿으려고 안간힘을 쓴다거나, 만약 어쩔 수 없이 닿을라치면 다시 몸과 몸이 떨어질 때까지 호흡이 진정이 안 되고 손끝이 파들파들 떨린다거나, 어린 소년이든 나이든 영감님이든 너나할 것 없이 일단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바짝 경계를 한다거나. 뭐 그런 정도다. 이제는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싶으면서도 순간순간 번개가 번쩍하듯 다시금 온몸이 오그라든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평생을 지고갈 수밖에 없는 (아주 소소한 축에 드는) 공통된 기억이요 경험일 것이다.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왜 그들은 자신들이 남자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증명하고 싶어할까. 똑같은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 중 절반이 남자고 절반이 여자이며 자신이 대하는 그 선수들도 같이 먹고 마시고 숨쉬며 살아가는 이들인데. 비단 스포츠계에서만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회사의 회식자리에서, 같이 일하는 사무실의 어느 한 구석에서, 늦은밤 지하철 안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얼마 없는 학생회관의 어느 복도에서, 과방에서, 동아리방에서, 따스한 온기와 애정으로 가득해야 마땅할 어느 집의 안방에서,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유치원에서, 종일 책보따리를 메고 다니다 지친 아이들이 잠시 등을 기대는 학원 봉고차 안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를 나누던 앞집에서. 선생님에게, 친구에게, 선배에게, 낯모르는 어떤 남자에게, 갑자기 칼을 들이댄 남자에게, 경비아저씨에게, 사촌오빠에게, 삼촌에게, 배다른 오빠에게, 의붓아버지에게, 친오빠 친아버지에게. 그런데도 피해를 입은 이들은 말이 없고(혹은 말을 할 수가 없고) 남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른 자들은 여전히 넘치고 넘쳐난다.

무엇이 문제일까. 자신이 저지른 일이 똑같이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와 누이와 딸들에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를까.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속으로 삼킨 채 까무룩 어둠속으로 정신을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술도, 우발적인 실수도 필요없고, 이유도 필요없고, 변명도 필요없다. 남자라는 이유로, 조금 더 완력이 세다는 이유로, 직위고하를 따져서 우위에 있다는 이유로 성(性)을 무기삼아 타인의 인생을 침해하고 짓밟는 일을 저지른 자들은(혹은 그런 시도를 한 자들 역시) 모두 유죄다. 집행유예도 사면도 반성도 필요없는 철저한 유죄여야만 한다. 법전에 구구절절 나열되어 있는 법에 의해 유죄판결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사람’이기 때문에 유죄다.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들의 삶을 난도질한, 사람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2008/02/14 16:02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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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 R X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와 누이와 딸들은 짐승의 욕구가 발동하는 '한낮 여자'라는 범주에서 어떻게 신기하게도 빠지기 때문이 아닐까나. 물론 그 범주에 포함시켜버리는 1000%미쳐버린 개도 있지만.
2008/02/15 10:27

misha X
타인이 휘두르는 완력/공포/그 이외의 모든 위협이 되는 것에 농락당하고 짓밟힌다는 게 어떤건지 짐작도 못할거야. 똑같이 되갚아주고는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수고로움도 사치, 그냥 손모가지를 뎅강 잘라버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도 든다.
2008/02/15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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