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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올드만 [창고/사랑해마지 않는 그들]

예전에 소루 님이 쓰셨던 [폭력의 역사] 리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비고는 자신이 모르는 인물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인물을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소루 님 못지않은 비고 빠로서 나 역시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이 사람은 어떤 역을 연기해도 ‘비고 모텐슨’ 배우 본연의 이미지가 깔려 있달까…. TV 시리즈를 제외하고 적어도 국내에서 구해볼 수 있는 비고 씨 출연작은 어지간히 챙겨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작품들 속에서 비고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어딘가 모르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역할을 제대로 이해/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소루 님이 얘기하신 그대로 ‘비고가 연기하는 인물은 비고’ 이 말이 딱 정답인 듯. [G.I.제인]의 존과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 [퍼펙트 머더]의 데이빗과 [프로페시]의 루시퍼와 [데이라잇]의 로이(후…;;)를 돌이켜보라. 이건 비고 씨의 외모적 특징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연기하면서 지향하고자 하는 지점이 그런 부분에 있는 것 같다. 분명 영화 속 한 인물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는 ‘비고 모텐슨’이라는 배우의 자아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고 모텐슨이라는 사람 안에 그렇게나 많은 페르소나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한 연후에 또 다시 자신만의 색채를 덧씌움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느낌, 영화 속 인물과 비고 모텐슨이라는 실존인물이 융합되면서 일어나는 기묘한 화학변화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 비고가 연기하는 스타일과 좀 상반되는 입장의, 즉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종처럼 찾기 힘든 경우는 또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 딱 생각나는 인물은 바로 게리 올드만이다. 게리 올드만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반 없는 상태에서 [불멸의 연인]의 베토벤과 [레옹]의 부패경찰 스탠필드가 같은 배우라고 했을 때 단박에 ‘아, 그렇구나’라고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생각하는 게리 올드만은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에 올인하는 스타일의 배우다. 비고 모텐슨과 나란히 놓고 봐도 그가 갖고 있는 존재감이 오히려 나았으면 나았지 절대 못하지는 않고, 배우 자신의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지나치게 개성적이라면 개성적이랄까) 신기하게도 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를 볼 때마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곤 한다.  








조각같은 미남인가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미중년인 게리 올드만 씨


워낙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이니만큼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실력이야 100% 보장하지만 역시 게리 올드만은 악역을 맡았을 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렬함이 무엇보다 돋보인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깊이를 알 수 없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깊다’를 강조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트루 로맨스], [레옹], [일급살인]에서의 게리 올드만을 떠올려보라. 철저한 악역이라기보다는 좀더 종잡을 수 없고 복잡다단한 악역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한다는 점에서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선(善)보다는 악역의 이미지에 좀 더 걸맞다는 것도 인정한다([배트맨 비긴즈]에서 게리 올드만이 ‘착한’ 역이고 ‘죽지도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누차 얘기했건만 결국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_-). 그러나 그런 배우가 [드라큐라]에서는 드라큐라이고 [주홍글씨]에서는 아서 딤즈데일이고 [배트맨]에서는 고든이란 거다. 아서 딤즈데일과 고든의 얼굴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했던 악역들의 그림자를, 아니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의 느낌을 찾아낼 수 있는가?(난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컷을 죽 나열해봐도 분명 ‘닮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조금의 공통점도 찾아낼 수가 없다. 팬심의 차이인가? 글쎄, 그건 아니라고 본다. 배우 자체의 존재감을 죽이고 캐릭터에 전부를 바치면서도 역시나 능수능란하게 얄미울 정도로 완급을 조절한다. 나름 비중있는 조연이기는 했지만 결국 주연은 아닌 상황에서 그가 크리스찬 베일 앞에서 철저히 그 자신을 낮추었던 것처럼.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지닌 그릇과 고든이라는 영화 속 인물이 지닌 그릇 중 그는 철저히 고든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거기 존재하는 것은 그저 고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바로 그 부분이다. 처음엔 분명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영화 속 그가 연기한 특정 인물의 이미지만이 남아 있고 그 이미지들은 각각 별개의 기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간다.

비고 모텐슨과 게리 올드만이 출연하는 영화를 단지 그들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도 보러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비고 모텐슨의 경우 그가 만들어내는 그만의 캐릭터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고, 게리 올드만의 경우 그가 몰입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결론→[이스턴 프라미스] 보러가고 싶었는데 결국 공쳤다. OTL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역시 비고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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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11:01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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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irdre R X
...나중에 환갑잔치 하실 때 기린이더러 예식장 대신 영화관 하나 빌리라고 하세요. 거기서 폭력의 역사랑 이스턴 프라미스 동시상영 환갑잔치를 하시는 겁니다. 바빠서 못 봤다고 하지 마시고 다 엄마가 네 태교를 위해 비고씨도 포기했으니 그 은혜를 갚으라~~
2008/12/23 12:26

misha X
그거 참 좋은 생각입니다. 안 까먹게 적어놔야겠어요.
2008/12/24 10:29

멜Mel R X
이리저리 파고들 정도는 아니지만 게리 올드만은 정말 좋아. 사실 많이 보질 못해서 이런말 하긴 뭐하지만서도. 나로선 게리 올드만이 아닌 베토벤은 상상하기 힘들고, 드라큘라에서도 '흐읍' 할 정도로 멋졌어.
2008/12/23 13:09

misha X
[드라큐라]에선 워낙 역할 자체가 압도적이어서 더 그럴 거예요.
아 참, 조카님 탄생 축하드려요. +_+
2008/12/24 10:29

N. R X
<이스턴 프라미스>가 1만을 넘겼다고 합니다. 서울 외 다른 곳에선 그냥 '형식상' 걸었다 내린 듯한데, 사실 서울에서도 극장은 네 군데 걸려있지만 일부는 하루 1회 상영이 고작이기도 해요. 그럼에도 1만을 넘겼으니 볼 관객들이 꾸준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는 얘긴데,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은 볼 수 없는 게 현실이기도 하네요.

미로비젼에서 얼마 전에 미로스페이스 2주년영화제를 하면서 그네들 수입작이었던 <폭력의 역사>를 상영해줘서 보고 왔답니다. 다시 봐도 역시 걸작, 거기에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라미스>는 확실히 이란성 쌍둥이 같은 영화들인지라 여러모로 더욱 흥미로웠고 새로 보이는 지점들도 많았어요. 마리아벨로 vs. 나오미와츠의, 완전히 다른 (조폭의) 세계에 대처하는 여성의 자세의 대비가 관심을 끌더군요.

그나저나 게리 올드먼은 진짜... <배트맨>에서 착한 역으로 나오는데, "저 아저씨 저러다 변절할 거야 흑흑" 이러고 있는데 웬걸, 계속 착하고 죽지 않는 거 보고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말입니다. 흐.
2008/12/27 15:21

misha X
크로넨버그 감독 팬이라면 반드시 보러 갈 영화이기도 하고, 또 완성도도 높은 영화니까요. 내심 이 영화 기다린 팬들도 많을텐데 역시 사는 지역에 따라 미처 못 보는 분도 많을 거 같아 더 아쉽습니다.
안 그래도 나중에 [이스턴 프라미스] DVD 나오면 [폭력의 역사]랑 나란히 보려고요. 다시 보시고 오셨다니 마냥 부러울 뿐입니다.

으흐흐 게리 올드만은 진짜...;; 제가 주변지인들한테 '[배트맨]에서는 착한 역할에다가 죽지도 않는다니까!!'라고 숱하게 얘기했지만 결국 영화 다볼 때까지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어요 흑흑.
ㅠ_ㅜ
2008/12/30 06:45

까스뗄로 R X
표현력이 딸려서 뭐라 더 말을 더하진 못하겠지만요. 미샤님, 소루님 말씀에 다 공감이에요. 비고님은 비고 캐릭터. 게리 올드먼은 자기를 지우고 온리 캐릭터. 진짜 그런 느낌이 나요. 레옹에서 캐미친 형사 같은 건 특히... 어우, 드라큘라 때 사진은 이렇게 봐도 또 안타깝네요. 그 양머리 분장이랑 클림트 그림 코스프레 같은 의상이랑 그런 게 자꾸 생각나요.
2008/12/28 16:16

misha X
양머리!!! (끄하하하하하하)
그런데 정말 그 표현이 딱이네요. 전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 분장할 때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 피부화장 때문에 알레르기로 꽤 고생많았다는 얘길 들은 것도 같습니다.
2008/12/30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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