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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32주 [일상/기린이 이야기]

보통 임신 7, 8개월 정도 되면 태동이 놀랄 정도로 세져서 마치 축구공이라도 차는 것마냥 뻥뻥 차대기 때문에 자다가도 ‘헉’ 소리를 내며 깬다고들 하는데 기린이는 글쎄…. 움직임이 좀 많아지긴 했지만 그렇게 과격하진 않고 꽤나 부드럽게 태동을 느끼게 하는 편이다. 주로 새벽녘에 온몸을 뒤채는 것처럼 2, 3분 정도 꿀렁꿀렁하기도 하고(smk군과 나는 이걸 ‘쇼타임’이라고 부른다. 가끔 저녁에도 몇 번 하기도 한다. 상당히 재밌다. :3) 팔 다리를 쭈욱 뻗는지 안에서 쓰윽 하고 웨이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끔 발이 있을 법한 위치에서 뭔가가 쑥하고 잠깐 솟아오르기도 하는데 smk군은 매번 이 타이밍을 놓쳐서 조금 뾰루퉁해 있다. 여튼간에 전반적으로 꽤나 젠틀한 태동을 느끼게 하는 기린이여서 나 좋을대로 ‘온화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기린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입덧 끝나고 한 7개월 때까지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잘 지냈는데 8개월 접어들면서 육아휴직 관련 규정 찾아보고(별 성과는 없었다-_- 오히려 속만 상했지), 모유수유 관련 자료 찾아보고, 그러면서 역시나 그지같은 우리나라 보육정책에 한 사흘에 한번 꼴로 잠시 버럭질 비슷한 걸 하다가 마트가서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분유통들을 보면서 다시 울적해지는 걸 반복하다보니 이건 뭐 산전우울증도 아니고 뭐라 설명하기 힘든 멜랑꼴리한 기분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심할 때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룩주룩 흐른다든가 뭐 그런 식(그러고는 5분도 안 되어서 바로 잠이 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미우라 아야꼬의 『길은 여기에』와 『이 질그릇에도』를 번갈아 읽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 책들이었냐 하면, 집에 있는 책 중에서 가장 온건한 축에 드는 책들이라; 내용도 잔잔하니 좋기도 하고.

그 와중에 어제는 2주만에 다시 병원을 갔는데 이런, 기린이는 어느새 추정체중 2.2㎏의 우량태아로 자라있었다(쿨럭). 머리둘레도 배둘레도 허벅지뼈 길이도 모두 31, 2주의 평균치를 훌쩍 웃도는 35, 6주의 발달상태…. 그 중에서도 머리둘레가 제일 크고; OTL 아니 나는 이제 63㎏인데 대체 어째서?? 의사는 이제 밥 먹는 양을 10% 정도 줄이고 하루에 30분씩 걷기운동을 하면서 체중조절에 들어가라는데 그것 참-_- 요즘 들어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깎아야 하던 손톱을 열흘에 한번 정도로 깎게 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던 나의 슈퍼울트라큐티클헤어가 나날이 푸석해져서 빗도 잘 안 내려가는 것도 영양이 죄다 기린이한테 가서 그렇게 된 거였구만!! 그래, 안 자라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 그냥 wii fit에 사용자 등록해놓고 하루에 10분씩 멀티스텝하기로 정했다.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게 막힌 것 같은 느낌은 꽤 되었는데 요즘은 자다가 숨이 막혀서 켁켁대며 일어나는 일도 점점 잦아지고 해서 물어봤더니 아기가 크면서 자궁이 폐와 심장을 압박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산모님하고 아기 아빠가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어도 그게 같은 위치에 있는 게 아니라, 아기 아빠는 평지에 있는데 산모님은 해발 2,000m 위에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시나 상큼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의사선생님,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줘서 고맙긴 한데 왠지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제 9개월 시작. 엄마한테 빨래삶을 들통도 하나 얻어왔고 했으니 슬슬 기저귀도 주문해야 할 것 같고, 집안 여기저기 쌓여있는 잡동사니들도 정리해서 치워야겠고, 배냇저고리랑 속싸개 등도 이제 좀 보러 다녀야겠고. 어제 병원비 수납할 때 제대혈 기증에 대해 물어봤더니 제대혈 공여는 가능하다고 얘기하는데 기증과 공여는 좀 다르지 않은가; 서울에는 제대혈 기증/공여 관련해서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병원이 좀 있는 것 같은데 부산에서는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좀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다. 1월 중에는 설 연휴도 있고 해서 더 몸이 무거워지기 전에 알아보고 해두어야 할 것들을 꼽아보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앞으로 꼭 8주가 남았다.



2008/12/28 08:42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21
크리스마스 [일상/보고, 듣고, 느끼다]


이미지 출처 : corbis.com


국민학교 1학년 때던가, 유치원 때던가, 아직 천지분간 모르는 딸내미들에게 아부지는 ‘산타 할아버지란 건 없으며 크리스마스는 외국의 명절에 놀아나는 상술에 불과하다.’라고 단언하셨더랬다. 아무리 어리다고 한들 산타 할아버지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대를 하게 마련인데 저렇게 딱 잘라 말씀하시니 별 수 있나. 옆에서 듣고 있던 고모가 외려 깜짝 놀라 부랴부랴 봉봉초콜릿이며 사탕이며 산타 인형이며 등등을 사다가 안겨주셔서 그 해는 그렇게 넘어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 나와 동생의 머리맡에는 엽서 한 장이 놓여 있었는데 역시나 ‘산타는 없다’라는 내용이 적힌 아부지 나름대로의 소신 가득한 성탄&새해 인사가 한 바닥 가득…; 여튼 어릴 때부터 그런 식이다 보니 자연히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별반 들뜨는 것 없이 [십계]나 [벤허] 챙겨보고 동생이랑 둘이서 피자 한 판 시켜먹고 하는 게 전부. 나중에는 크리스마스랍시고 쏟아져 나오는 인파 사이에 파묻히는 것도 진저리날 정도로 싫어서 일찌감치 조각케이크 몇 개 사들고 들어와 이불 돌돌 몸에 감고서는 밀린 DVD와 책 보는 걸로 나름 알차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더랬다.

그런데 smk군 얘기를 들으니 시댁에서는 어릴 때부터 트리 장식을 꼬박꼬박 했다고 한다(그것도 시아버님이 직접 소나무 작은 걸 어디선가 들고 오셔서;). 그리고 smk군의 로망 중 하나가 [나홀로 집에]에 나오는, 온 동네가 정원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알전구를 나무나무마다 주렁주렁 걸어놓고 반짝반짝거리는 소위 ‘불동네’(smk군의 표현)에 가보는 것. 그런데 나는 마트 장보러 갔을 때 트리 장식 판매코너 앞에서 서성대는 smk군더러 집도 어수선한데 귀찮은 물건 하나 더 늘일 생각 말라고 잔소리를 했으니…; OTL 생각해보니 결혼하고 나서 두 번째 맞는 크리스마스인데 작년에는 내가 회사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었던 때라 유야무야 넘어갔고, 올해는 뭐 제대로 분위기 내려면 낼 수도 있긴 하겠지만 12월 들어 계속 바빴던 탓에 집은 가히 폭풍전야,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는 상태라 보기만 해도 절로 정신 사나워지고; 의외의 곳에서 낭만 비슷한 것을 기대하는 smk군을 위해 초콜릿케이크라도 구워볼까 했지만 계란 흰자 거품내기도 힘들고, 입덧이 다시 오려는지 며칠째 속은 메슥거리고, 아침마다 눈 떠서 출근하는 것부터가 시련이고-_- 대신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케이크&와인 장터’에서 케이크를 할인해서 판다기에 노엘 케이크 꼭 사오라고 일러뒀다. 집에 갈 때 마트 들러서 새우랑 피자치즈랑 몇 가지 사가지고설랑 고구마 안주 만들어주며 트리 사지 말라고 잔소리했던 거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결혼한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크리스마스에도, 앞으로도 계속 죽 함께 있을 수 있는 거 아니냔 말이지(더불어 집도 같이 어질러 가며-_-).

온누리에 평화. 다들 즐거운 성탄 맞으시길.



2008/12/24 11:30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6
게리 올드만 [창고/사랑해마지 않는 그들]

예전에 소루 님이 쓰셨던 [폭력의 역사] 리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비고는 자신이 모르는 인물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인물을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소루 님 못지않은 비고 빠로서 나 역시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이 사람은 어떤 역을 연기해도 ‘비고 모텐슨’ 배우 본연의 이미지가 깔려 있달까…. TV 시리즈를 제외하고 적어도 국내에서 구해볼 수 있는 비고 씨 출연작은 어지간히 챙겨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작품들 속에서 비고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어딘가 모르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역할을 제대로 이해/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소루 님이 얘기하신 그대로 ‘비고가 연기하는 인물은 비고’ 이 말이 딱 정답인 듯. [G.I.제인]의 존과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 [퍼펙트 머더]의 데이빗과 [프로페시]의 루시퍼와 [데이라잇]의 로이(후…;;)를 돌이켜보라. 이건 비고 씨의 외모적 특징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연기하면서 지향하고자 하는 지점이 그런 부분에 있는 것 같다. 분명 영화 속 한 인물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는 ‘비고 모텐슨’이라는 배우의 자아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고 모텐슨이라는 사람 안에 그렇게나 많은 페르소나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한 연후에 또 다시 자신만의 색채를 덧씌움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느낌, 영화 속 인물과 비고 모텐슨이라는 실존인물이 융합되면서 일어나는 기묘한 화학변화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 비고가 연기하는 스타일과 좀 상반되는 입장의, 즉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종처럼 찾기 힘든 경우는 또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 딱 생각나는 인물은 바로 게리 올드만이다. 게리 올드만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반 없는 상태에서 [불멸의 연인]의 베토벤과 [레옹]의 부패경찰 스탠필드가 같은 배우라고 했을 때 단박에 ‘아, 그렇구나’라고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생각하는 게리 올드만은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에 올인하는 스타일의 배우다. 비고 모텐슨과 나란히 놓고 봐도 그가 갖고 있는 존재감이 오히려 나았으면 나았지 절대 못하지는 않고, 배우 자신의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지나치게 개성적이라면 개성적이랄까) 신기하게도 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를 볼 때마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곤 한다.  








조각같은 미남인가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미중년인 게리 올드만 씨


워낙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이니만큼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실력이야 100% 보장하지만 역시 게리 올드만은 악역을 맡았을 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렬함이 무엇보다 돋보인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깊이를 알 수 없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깊다’를 강조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트루 로맨스], [레옹], [일급살인]에서의 게리 올드만을 떠올려보라. 철저한 악역이라기보다는 좀더 종잡을 수 없고 복잡다단한 악역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한다는 점에서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선(善)보다는 악역의 이미지에 좀 더 걸맞다는 것도 인정한다([배트맨 비긴즈]에서 게리 올드만이 ‘착한’ 역이고 ‘죽지도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누차 얘기했건만 결국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_-). 그러나 그런 배우가 [드라큐라]에서는 드라큐라이고 [주홍글씨]에서는 아서 딤즈데일이고 [배트맨]에서는 고든이란 거다. 아서 딤즈데일과 고든의 얼굴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했던 악역들의 그림자를, 아니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의 느낌을 찾아낼 수 있는가?(난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컷을 죽 나열해봐도 분명 ‘닮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조금의 공통점도 찾아낼 수가 없다. 팬심의 차이인가? 글쎄, 그건 아니라고 본다. 배우 자체의 존재감을 죽이고 캐릭터에 전부를 바치면서도 역시나 능수능란하게 얄미울 정도로 완급을 조절한다. 나름 비중있는 조연이기는 했지만 결국 주연은 아닌 상황에서 그가 크리스찬 베일 앞에서 철저히 그 자신을 낮추었던 것처럼.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지닌 그릇과 고든이라는 영화 속 인물이 지닌 그릇 중 그는 철저히 고든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거기 존재하는 것은 그저 고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바로 그 부분이다. 처음엔 분명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영화 속 그가 연기한 특정 인물의 이미지만이 남아 있고 그 이미지들은 각각 별개의 기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간다.

비고 모텐슨과 게리 올드만이 출연하는 영화를 단지 그들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도 보러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비고 모텐슨의 경우 그가 만들어내는 그만의 캐릭터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고, 게리 올드만의 경우 그가 몰입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결론→[이스턴 프라미스] 보러가고 싶었는데 결국 공쳤다. OTL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역시 비고 빠;




미중년, 비고 모텐슨

2008/12/23 11:01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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