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피시』 컴플리트 박스 세트-오, 탈자 점검 중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바나나피시』 팬이 된 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었는데 컴플리트 박스 세트를 어찌 구입않고 넘어갈 수 있겠나. 게다가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네이버에서 ‘바나나피쉬’ 치면 파라반 님 홈이랑 내가 썼던 감상문 링크가 나란히 뜬단 말이지(쿨럭). 네이버 검색결과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요청해서 대부분의 네이버 검색에서는 내 홈이 안 걸리는데 『바나나피시』랑 『KISS』는 예외다. 딸램 낮잠자는 사이사이 틈틈이 읽느라 그렇게 꼼꼼하게는 못 봤지만 일단 지금까지 눈에 띈 것들만 간단히 적어둔다. 다는 못 읽고 6권 초반까지만, 그나마도 날림으로 읽었음. 1권 189쪽 칙임→책임
2권 248쪽, 251쪽 밧데리→기왕이면 ‘배터리’로 고쳤으면 좋았을 텐데; 3권 132쪽 명세컨대→맹세컨대 5권 32쪽 Bon Boyage→Bon Voyage가 아닌지? ; 6권 38쪽 애쉬→애시 / 뒷표지 갖혀→갇혀 (앞으로 계속 추가 예정.)
번역은 크게 불만은 없다. 예전 시공사판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낯선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표기법을 준수한다는 출판사의 입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니까. 일본 원판에 보다 더 충실한 것도 좋고, 아무 생각없이 넘어가기 쉬운 부분에도 세심하게 주석을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도 참 좋다(이를테면 제시카를 폭행한 놈들이 맥스에게 ‘블랑카와 로보’ 어쩌구 하는 장면이라든가,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레드 더글러스의 관계라든가). 하지만 ‘희생양’을 굳이 ‘스케이프고트’라고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희생양으로 쓰고 옆에 괄호표기해도 좋았을 텐데, 순간 음? 하고 말았네. 2009/07/05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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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아프리카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 박희정
신일숙, 강경옥, 이은혜 같은 대선배작가들과 함께 <윙크> 창간호부터 투입된 박희정은 나예리, 천계영과 함께 <윙크>가 배출한 신인 중 현재까지 가장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데뷔 때부터 아름답고 유려한 그림체와 강렬한 원색과 은은한 파스텔톤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컬러 일러스트로 독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박희정은 『I can't stop』으로 연재의 흐름을 익힌 후 드디어 『호텔 아프리카』의 문을 열게 된다. 영화를 향한 꿈과 열정으로 뭉친 세 젊은 남녀와 어린 시절 유타의 뜨거운 태양 아래 하나둘씩 피어났던 호텔 아프리카의 추억들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진다. 물론 때로는 다소 성급하고 서툰 결말로 끝을 맺은 에피소드도 있긴 하지만, 『호텔 아프리카』는 결코 신인답지 않은 호흡과 연출, 감각적인 그림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때로는 남녀간의 아스라한 사랑, 때로는 동성간의 우정 그 이상의 짜릿한 감정, 때로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우수에 젖은 서정적인 이야기들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더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이 작품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은 작가가 그만큼 들인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독 초롱초롱 빛을 가득 담은 인물들의 눈부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옷 주름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넘어가는 법 없이 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처럼 물이 오를 대로 오른 그림과 컬러는 비록 아니어도, 충분히 박희정만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그림체는 그야말로 ‘보는 맛’이 난다. 주인공들의 개성에 걸맞는 스타일리시한 차림새 또한 신일숙이나 강경옥, 황미나 등의 기성작가들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신선함으로 다가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중요요소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가식과 편견없는 진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호텔 아프리카’의 사람들처럼, 정말 하고픈 이야기를 소중히 품고 있다 조심스레, 정성스레 가다듬어 들려주고 싶은 신인작가의 설렘과 두근거림이 『호텔 아프리카』를 더욱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든다. 그때 그 시절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릴 수 없었을, 대가의 원숙한 그림과 연출이 아니기에 오히려 더 와닿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묘한 부분이다. 90년대 말, 컴퓨터와 디지털의 홍수가 밀어닥치기 일보직전의, 손맛이 살아있는 따스한 그림과 아날로그적 감성이 던지는 향수가 2009년 지금 이 작품을 읽었을 때 더 짠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박희정은 과연 『호텔 아프리카』 같은 작품을 다시 그릴 수 있을까?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 글쎄….
2009/05/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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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버스 비너스(Nervous Venus)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 와세다 치에早論田ちえ
주인공 세키야 하루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미나토 아키라를 ‘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사라진 혜성’이라고 표현한다. 말 그대로 미나토 아키라는 단행본 1권 30여 페이지만에 죽음을 맞는다(그나마 죽었다는 것도 타카즈카 유지와 하루의 전화통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아키라가 죽은 다음에야 그도 역시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루는 마음을 닫게 되지만 북고에 진학 후 또 하나의 혜성, 세키 요지를 만나게 된다. 이미 죽고 없는 자와 남은 두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삼각관계. 이렇게 되면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와 비슷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터치』의 타츠야, 카즈야, 미나미의 경우는 카즈야의 존재를 타츠야와 미나미 모두가 기억하고 절대 지울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으며 쌍둥이라 할지라도 미나미는 타츠야와 카즈야를 철저히 독립된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너버스 비너스』의 하루와 요지, 아키라의 경우 아키라의 카리스마와 독특한 존재감이 요지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하루 역시 은연중에 그 유사한 존재감에 이끌리고 있다. 마음을 닫기 전의 하루는 그러한 아키라의 존재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아키라의 죽음 이후 그녀는 요지의 호의를 내면에의 ‘침범’으로 간주하고 경계한다. 그만큼 자신 안에서의 아키라를 위협할 정도의 존재로 무의식중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요지와 아키라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마는 것이다. 요지 입장에서 보자면 상당히 불쾌하고 또 불리한 게임일 수밖에 없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될 십대 남자아이라면 더더욱. *일본 아마존에서 검색해보았지만 그곳에도 6권까지만 리스트에 올라있다.
2009/05/12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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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없는 세상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김은희
<나인>에 연재 당시(2000년) 작가의 곁에 함께 있었던 신디와 추새는 그 사이 종적을 감추었고, 날지 못하는 비둘기 앨리스도 아마 천수를 다한 것 같다. 신디와 추새, 앨리스가 있던 자리에 작가의 남편과 아들 이카가 새로이 부부와 가족의 인연을 맺으며 작품 연재 시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양이 페르캉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모습.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이들이 생겼음에도 작가는 청소기를 돌리다 사라진 신디와 추새를 떠올리며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책장을 넘기던 나도 순간 울컥하고 목이 메고 말았다). 언제나 함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존재들과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는 때가 오는 그 순간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0여 년이라 한다.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동안 함께 울고 웃고 뺨을 부비며 살아온 고양이들과 헤어져야만 할 때…. 그래서 제목이 『나비가 없는 세상』인 걸까. 언젠가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 이별의 순간 때문에? 혹은 이런 생각도 든다. 만약 나비―즉 고양이―가 만약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더없이 큰 기쁨과 감동을 느낄 또 하나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나비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메마르고 삭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을까. 데뷔 이후 굵고 힘 있는 펜선으로 그려내는 강렬한 그림체(『나의 강』, 『M&M』, 『Guyz』 및 「귀환선」, 「Some like it hot」과 같은 다수의 단편들)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작가의 화풍은 <윙크>에 『소년별곡』을 연재하면서부터 새로운 전환기에 접어든다. 바로 스크린톤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철저히 수작업만으로 모든 장면을 표현해낸 것이다. 스크린톤 없이 오직 펜선의 필압 조절만으로 (이 역시 탄탄한 데생력과 필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더욱 세밀한 명암과 양감과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묘사하며 한층 더 깊어진 그림체로 한 발짝 나아간 작가의 화풍은 『나비가 없는 세상』에서 다른 작품에는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을 더하게 된다. 바로 작품 속 고양이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해 애착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비가 없는 세상』의 고양이들 역시 작품 속 주인공으로 그만한 관심을 주는 것 역시 ‘작가’로서의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또 다르게, 『나비가 없는 세상』의 고양이들은 정말 온 마음, 온 정성을 다해 데생을 하고 펜선을 입혔다는 느낌을 준다. 그저 내 곁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 신비롭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독립된 하나의 귀한 생명체를 조심조심 종이 위에 옮겨놓고는 사랑하는 마음에 잉크를 풀어 따스한 시선의 펜촉에 그 잉크를 묻혀서 보드라운 털 한 올 한 올을 정성스레 그려낸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점에서 고양이를 소재로 한 다른 만화들(『왓츠 마이클』, 『Cat』, 『묘한 고양이 쿠로』 등)과는 확연히 다르다. 『나비가 없는 세상』의 신디, 추새, 페르캉은 단순히 작품의 소재/주인공이 아닌,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작가의 동반자이며 서로의 안식처이자 평생 잊지 못할 ―혹은 잊을 수 없는― 귀한 인연인 동시에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런 대상들을 어찌 말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말과 글로 나타낼 수 없는 그 수많은 감정들이 신디의 또랑또랑한 눈빛, 추새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페르캉의 반지르르한 털결에 듬뿍듬뿍 묻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 사랑을 나누어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고양이라는 신비한 존재, 반려동물의 의미, 나아가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따스한 마음과 한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나비가 없는 세상』. 부디 신디와 추새, 페르캉을 비롯한 고양이들, 작은 생명체들이 힘없고 낯설고 익숙치 않다는 이유로 고통받지 않고 제 생명을 다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 작은 기원을 담아본다.
2008/05/3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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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토란테 파라디조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오노 나츠메
오노 나츠메의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는 위에서 언급한 궁금증과 기대를 120%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라 퀸타 카메라』와 『not simple』, 『납치사 고요』에서 보여주었던 자연스러운 연출과 섬세하면서도 결코 임계점을 넘어서지는 않는 절제된 감정선이 자아내는 조화로움은 『리스토란테 파라디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총 여섯편의 에피소드와 짤막한 마지막 에필로그.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책 한권 안에 리스토란테 ‘카제타 델로르소’에서 일하는 6명의 종업원들과 니콜레타, 그리고 그녀의 엄마 올가…심지어는 엑스트라 중의 엑스트라 격인 루치아노의 손자 프란츠에 이르기까지. 급격한 사건 전개 없이도 대사 한 마디, 장면 하나, 주인공의 뒤편에 서 있는 이들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에서도 『리스토란테 파라디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성격 단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저마다 얼마나 뚜렷한 개성과 깊이를 지니고 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일반적인 모녀관계나 모성애의 발현이 아닌, 여자 대 여자로 다시 만난 올가와 니콜레타의 관계 역시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어린 딸을 부모에게 맡기고 떠나버린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니콜레타는 어느새 동경하던 성숙한 여자의 면모를 엄마인 올가에게서 발견하게 되고, 오랜 시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딸에게서 자신과 닮은 구석을 찾아낸 올가는 뒤늦게나마 우정과도 같은 자신만의 모성애에 눈을 뜨게 된다. 친구 가브리엘라 앞에서 딸의 사랑을 응원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올가와 아버지뻘인 클라우디오에게 거리낌없이 한 발짝씩 다가서는 니콜레타.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 위에 성숙한 어른/성숙한 여자의 삶과 사랑, 그들만의 새로운 유대관계의 한 장을 써나가는 모습 또한 잔잔한 수면 아래 조용히, 그러나 쉼 없이 일렁이는 물결 마냥 읽는 이의 마음까지 흔들어놓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리스토란테 파라디조. 어딘가엔가 분명히 존재할 듯한 천국같은 그곳. 맛있는 음식이 주는 즐거움, 공기 중에 녹아든 멋진 중년들의 관록, 세월의 축복이 더해져 더욱 깊어져가는 그들의 우정과 교감, 조금씩 시작되는 사랑. 그래서 더욱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카제타 델로르소, 『리스토란테 파라디조』다.
2008/05/19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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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스틱코스메틱-마법을 경험하고픈 당신에게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 김미경
화장은 마법. 실로 그 말이 정답이다. 가늘고 밋밋한 홑꺼풀의 눈을 한층 더 또렷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주고, 얼룩덜룩 남아있는 여드름 자국을 완벽하게 감춰주고, 늘 부르트고 쥐어뜯어 볼품없는 입술을 도톰하게 보이게 해주고, 가무잡잡한 얼굴빛을 화사하게 바꿔주는―그야말로 ‘이게 정말 나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마법 아닌 마법. 궁극의 화장발인 웨딩화장의 결과 m냥도 이렇게 변신하는 터이니 이게 마법이 아니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이런 마법이라면 욕심 한번 부려보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난생 처음 내 화장품이란 것을 사보고(사실은 결혼하고 나면 더 이상 동생 화장품을 못 쓰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샀다. 그것도 기초화장품;), 친구에게 부탁해서 함께 면세점에 가서 이것저것 예쁜 색깔의 섀도며 립글로스도 사보고 여행용 콤팩트도 샀건만 정작 어떻게 써야할 지를 당최 알 수 없으니 그저 서랍 속에 모셔둘 수밖에. 모르긴 해도 꾸준히 화장을 해온 사람들이 아니라면 정작 서랍 속에 가득한 각종 색조화장품들과 기초화장품을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써야 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기껏해야 패션잡지에 나오는 ‘하우 투~’ 어쩌고 하는 정보란에 나오는 자투리 정보, 그것도 특정 회사의 특정 제품을 사용했을 때 적용가능한 정보들이니 나 같은 생초보들은 화장이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적어도 『환타스틱코스메틱』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 TV나 잡지, 아니면 백화점의 메이크업 시연회에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라며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런저런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정작 화려한 색조화장 아래 감춰진 기초화장이며 기본적인 세안과 피부관리에 대해서는 상식적인 수준의 정보만을 아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환타스틱코스메틱』의 목차가 화장 시작 전, 기초적인 피부관리를 위한 쾌변과 세안 등부터 시작한다는 점은 그래서 더욱 눈에 들어온다. 누구나 알 법한 상식적인 정보지만 각각 단편적으로 흩어진 정보들이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이어질 때 그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으로 발휘하며 독자들을 이해시킨다. 『환타스틱코스메틱』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적정선을 유지한다는 데에 있다. 온갖 브러시를 비롯한 각종 도구와 메이크업풀세트를 갖춘 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바로 내 방 내 화장대 위에 있는 화장품으로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굳이 백화점 1층의 비싼 화장품이 아니어도 지하상가 1층에 나란히 자리잡은 가게에서 산 조그만 섀도나 립글로스로도 나만을 위한 화장을 시도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점. 『환타스틱코스메틱』은 TV나 CF에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화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중요한 날, 기념하고픈 날, 혹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 하루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입자고운 파우더를 두들겨보고 숨 한번 멈추고 조심조심 아이라인을 그리고 싶을 때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동인 시절부터 귀여운 그림체와 특유의 유머로 눈길을 끌었던 작가의 장기가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빛을 발한다. 화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그러니까 나 같은;) 이들도 책장을 넘기며 혼자 피식거리다가 절로 나도 한번, 하며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게 하는 만화 『환타스틱코스메틱』. 굳이 화장에 대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번쯤 예뻐지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이라면, 또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한참 읽다 세수 후 스킨 로션을 바를 때 여느 때와 다른 손놀림으로 조심스레 눈가와 뺨 언저리를 매만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혼자 웃을지도 모를 일이다. 꼬리> 물론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해서 내가 화장을 잘하게 되었을 리는 없다-_- 늘 읽는 것과 실천은 별개의 문제; 누가 해준다면 얼굴을 내맡길 자신은 있건만;
2008/04/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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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를 위하여-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 이강주
『캥거루를 위하여』는 제목 그대로 캥거루 얼굴 뒤에 숨어서 사랑과 교감을 꿈꾸는 진홍과, 그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을 위한 만화다. 막연한 동경, 순간의 이끌림, 다소 저돌적이기까지 한 호감의 표현. 색다른 사랑의 기회가 매번 진홍을 찾아오지만 진홍은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거나 혹은 스스로 포기하곤 한다. 그러다가 먼 길을 돌고 돌아 만나게 된 진짜 사랑 앞에서 진홍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20대 초반 젊은이들의 사랑을 적당히 희화화시키면서도 작지만 무게있는 진심을 담아내는 것을 잊지 않는다는 점에서 『캥거루를 위하여』는 비단 주인공 진홍만이 아닌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청춘남녀들의 기억 한 자락과 겹쳐지는 기묘한(그리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매혹당하는 순간, 한눈에 반하게 되는 순간, 사랑을 시험해보고 싶어지는 순간, 엊그제까지만 해도 진짜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어제의 빛나던 그(녀)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순간, 사랑하다 못해 소유하고 집착하게 되는 순간―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겪게 되는 다채로운 희로애락의 파노라마.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만 때로는 이별도 맞이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의 진폭은 진홍이 쓰고 있는 캥거루의 가면 뿐 아니라 독자의 마음까지 흔들어버린다. 진홍은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캥거루의 가면을 선택한다. 그렇게 하면 언제까지나 안전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늘 누군가가 자신의 가면을 벗겨주기를, 그 누군가가 자신의 사랑이기를 소망한다. 결국 타인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우리, 타인과의 교감을 늘 갈망하는 우리. 사랑이라는 만국 공통의 키워드를 밑바탕삼아 혼자만의 감정으로부터 결국 인간(人間)이라는 낱말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 만화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읽는 누군가에게 있어서 『캥거루를 위하여』는 해묵은 옛사랑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타임머신이 되어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고리를 어떻게 맺고 풀고 돌파해나가야 할지를 넌지시 알려주는 길잡이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화려한 미사여구로 잔뜩 기교를 부린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녹아들어 있는 일상적인 독백과 대화, 부드럽지만 힘 있고 탄력 넘치는 펜선으로 그려진 그림, 조각조각 흩어진 감정의 파편 하나하나에 머무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빠질 부분이 없는 작품. 때는 바야흐로 봄, 마른 나뭇가지에 파릇하게 싹이 움트는 것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사랑이 움트기 시작하는 이들이 있다면, 넌지시 그들 손에 이 만화를 쥐어주고 싶어진다.
2008/03/25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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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인의 요리사(沈夫人の料理人)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 후카미 린코 그 와중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만화가 있으니 바로 『심부인의 요리사』. 제목 그대로 지체높은 유씨 집안의 안방마님인 심부인과 그녀를 열렬히 사모하는 요리사 이삼의 이야기다. 하늘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재료가 된다는 진미 중의 진미 중국요리가 더없이 투박한 이삼의 손에서 지고의 맛과 모양새, 심부인을 향한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당대 최고의 요리로 매 에피소드마다 등장한다. 뭐, 여기까지만 한다면 그냥 여느 요리만화와 크게 다를 바가 있겠나 싶기도 하겠다. 오히려 진기한 재료들로 만드는 산해진미를 보면서 괜히 눈만 높아진다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심부인의 요리사』의 매력은 다채로운 음식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요리를 만드는 과정들은 설명과 몇 컷의 그림으로 간략화되어 있고 이삼이 어떻게 해서 그 요리를 만들게 되는가 하는 원인에 더 치중한다. 그만큼 좀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마음, 맛있는 것을 먹는 순간만은 시름을 잊고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었으면 하는 마음,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하는 마음을 요리에 함께 담아내는 순간의 그 묘한 긴장과 설렘―요리를 해보고 또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 감정들이 더욱 독자에게 와닿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계속 손이 간다. 따분한 일상을 매일 오늘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으로 견디는 심부인이 어떤 방법으로 이삼을 자극하여 새로운 음식을 맛보는가가 매 에피소드의 기본뼈대이다.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 전형적인 구조임에도 『심부인의 요리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재미를 더한다. 도도하고 이기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한 심부인이 채찍과 당근양초를 적절히 휘두르며 어떨 때엔 이삼이 죽음을 각오하고, 또 어떨 때엔 마님을 향한 사랑에 불타올라 만들어내는 음식들. 마님을 향한 이삼의 순수한 마음과 사랑이 더해져 마침내 심부인의 식탁에 놓여지고, 마님이 한 숟갈을 입에 넣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동안 이삼의 긴장과 기대는 극에 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마님을 위해 요리에 쏟는 온갖 정성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이삼의 정성 그 이상으로 이삼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려 더 맛있는 요리를 먹기 위한 심부인의 노력은 마님의 미소를 능가하는 독자들의 웃음을 만들어낸다. 한없이 이삼을 궁지로 몰아가다가도 적절한 그 순간에 이삼을 향한 칭찬 한 마디를 잊지 않는 심부인. 겸허함과 자신감을 번갈아 키워주며 오늘도 요리사 조련에 여념이 없는 심부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어떤 식으로 묘사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심부인이 그저 심술맞은 캐릭터가 아닌 그녀만의 매력을 가진 캐릭터로 그릴 것인가가 이 작품에 있어서 요리 이상으로 고심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때로는 이삼의 마음이 되어, 때로는 심부인의 마음이 되어 머릿속에 이삼이 만들어낸 맛있는 요리 한 접시를 떠올리며 심부인의 미소를 입가에 떠올려본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먹는 사람을 위한 진심이 얼마나 좋은 향신료가 될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심부인의 요리사』. 읽고나면 내게도 이삼 같은 요리사 한명 있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만 품게 한다는 부작용을 제외하고는 이삼이 만든 요리만큼 더없이 만족스런 작품이다.
2008/03/1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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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simple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오노 나츠메
가족이 주는 따스함과 사랑을 찾아 헤매다 결국 비참하게 죽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는 참으로 통속적이고, 지나가며 보고 듣는 숱한 사건·사고 소식들 중 단편적이나마 겹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not simple』이 그저 흔한 이야기로 남지 않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절제되어 있는 연출 덕분이다. 짐의 말마따나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안의 삶은 지극히 단조롭고 차분한 어조로 묘사되고, 이를 전달하는 등장인물들 역시 좀처럼 격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이런 일들이 있었다.’라며 설명해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결과 일어나는 감정의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자신은 단 한번도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정작 이안은 짐, 그리고 아이린의 어머니가 가족의 온정에 다시금 눈을 뜨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출생의 비밀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이안은 그저 가족들을 만나고 싶고 언젠가는 그들 곁에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바람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너무나 오랜 시간 품어온 바람이기에 얼마만큼 간절한지조차 잊혀질 정도.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더럽혀질 수 있는지―. 이안의 삶이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백짓장처럼 하이얀 이안의 순수함과 그가 받은 상처는 역설적으로 더욱 강조되기만 한다. 따스하고 잔잔한 일상의 소품 모음집인 『La Quinta Camera~다섯번째 방』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야기의 주제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여간 예사롭지가 않다. ‘그저 좀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온정을 원했다.’라는 이안의 말처럼 『not simple』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참으로 심플하지만, 그 주제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심플하지 않다. 주인공의 슬픔과 고뇌를 고스란히 독자들의 가슴을 향해 직격탄으로 날려보내는 그 저력이란! 다만 그 슬픔과 고뇌가 너무도 크고 깊어서 간만에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는 만화를 만났다는 기쁨이 상쇄되어버리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2008/01/1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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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관 그래피티(麒麟館グラフィティ-)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요시무라 아케미吉村明美
『기린관 그래피티』. 어떤 연유로 이 책을 전권 구입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막상 집에 도착한 책들의 래핑을 뜯고서도 한동안은 펼쳐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맥주 한 잔을 옆에 가져다 놓고 하숙집을 무대로 벌어지는 밝고 유쾌한 청춘들의 즐거운 사랑 이야기려니 하고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집어든 1권은 초반부터 내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마지막 13권에 번외편까지 쉬지 않고 읽으면서 타에와 기쿠코와 우사미와…그들의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에 꽁꽁 매인 채 그렇게 속절없이 가슴만 쳐대었더랬다. 왜들 이렇게 바보 같을까, 왜들 이렇게 답답할까, 왜들 이렇게―. 그래서 한번 읽고 그냥 덮어버렸다. 책을 읽는 내도록 하나 둘씩 가슴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말 못할 그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사랑을 일부러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토록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실타래를 채 끊어내지 못한 것은 타에나 기쿠코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유모를 먹먹함에 책장 깊숙이 꽂아둔 『기린관 그래피티』 전권을 끄집어내어 또 가슴을 쳐가며 읽어대는 나 자신을 보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타인과 감정을 나눌 필요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 우사미. 그런 그가 자신의 감정을 분출할 배출구로 삼기 위해 선택한 희생양인 순수의 결정체 기쿠코. 우사미에 대한 해묵은 사랑과, 기쿠코에 대한 연민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타에.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픔과 고통으로 뒤바뀌고 만다. 우사미 히데츠구라는 난공불락의 거대한 산 앞에서 기쿠코는 매번 눈물을 삼키며 무릎을 꿇고, 타에는 몇 번이고 그 산에서 미끄러지며 울부짖지만 둘 다 우사미에 대한 감정을 쉬이 끊지 못한다. 한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했고 한번도 사랑해보지 못했다는 끈질긴 미련 때문에. 만약 2007년 지금, 기린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저런 전개와 속도로 그려낸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단호하게 맺고 끊으며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기에도 바쁜, 소위 ‘쿨하다’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일까, 『기린관 그래피티』의 그들은 2007년의 우리가 보기에는 한없이 답답하고 바보같기만 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실체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기까지 무려 13권이라는 권수를 요하는 느릿한 전개에 질려 아마 분을 못 이기고 책을 집어던진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느릿함이 바로 『기린관 그래피티』의 최고의 장점이요 미덕이다. 타에를 좋아하면서도 우사미와 맺어지는 이가 타에가 아니었다면 아마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을지도 모른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기쿠코와, 기쿠코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눈물 흘리던 타에가 우사미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끊지 못해 결국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들은 한두 권의 분량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타에의 감정, 기쿠코의 감정, 우사미의 감정은 제각각 A, B, C라는 명찰을 붙이고 차곡차곡 분류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작품 속 인물들도, 작품을 읽는 이들도 대체 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결국은 다시 앞권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수차례 되풀이한다. 오직 작가 한 사람만이, 당최 풀어낼 길이 전혀 없어보이는 감정의 혼돈 속에서 흔들림없이 중심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지럽기만 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번 숨을 멈추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 않던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명확한 주어와 서술어로 구사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냐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미묘한 떨림이 더 큰 감정의 파장을 낳기 마련이다. 더구나 타에와 기쿠코, 우사미처럼 애증과 집착과 연민과 환멸까지 뒤섞인 사이라면 더더욱.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늘 갈등하고 망설이고 서로를 시험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깨달아간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한 겹 두 겹 쌓여온 감정의 더께들이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딱딱하게 굳은 상처를 내보이며 진심을 전하는 그 순간, 작품 속 그들은 겨우 도달한 희망의 문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작품을 읽는 이들은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찾은 행복의 여운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 이제야 겨우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는 행복해져라, 라고 말할 수 있구나 하고. 힘겹게 얻은 사랑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닫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기에, 『기린관 그래피티』가 전하는 그 아련한 느낌은 아마 10년 후에 다시 책을 들추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삿포로의 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짧은 봄이 그토록 반갑고 아름답듯이, 그들의 사랑 역시 그렇게 반짝일 수 있었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이 몇 해가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것처럼.
2007/07/0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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