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서(序)-그 새로운 시작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그러니까 일본 애니메이션을 큰 화면에서 보기 위해서는 입소문으로 PC통신으로 알음알음 알아낸 각 대학교의 만화/애니동아리나 동호회에서 개최하는 상영회를 일일이 찾아다녀야만 했던 그때에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늘 애니 팬들의 인기와 관심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에바, AT 필드, 인류보완계획, 세컨드임팩트, 사도, 아담, 리리스…. 그때나 지금이나 무엇 하나 ‘이것이다’라고 명확히 단정내릴 수 없는 [에바]의 구성요소들은 숱한 의문점들을 남겼고 그로 인해 팬들은 저마다의 가설과 분석을 토대로 새롭게 [에바]를 해석하고 받아들이곤 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나, 2007년 공개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 서(序)]. 기존의 TV판과 비교해서 크게 달라진 부분은 없고 여전히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부분은 없지만 [에바]의 팬들이라면 아마 열의 여덟, 아홉은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열광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과연 나는 어떠한가? 적어도 두 번째 극장판인 [파(破)]를 보기 전까지는 [서(序)]의 자세한 감상을 잠시 미루어야 할 것만 같다. 물론 익숙한 장면들은 더없이 반가웠고, 훨씬 더 세련된 그래픽은 10년의 세월을 실감케 했으며, TV판과 달라진 부분에서는 조금 놀라기도 했고, 아스카가 끝까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하기는 했으나 그 모든 감정들은 [파(破)]의 예고편을 본 다음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히 가라앉아 기대감으로 마무리되었다. TV판과 [데스&리버스], [엔드 오브 에바]까지 모두 보기는 했으나 정작 ‘에바’ 자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그러나 평범한 일반관객보다는 훨씬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어정쩡한 위치(즉, 본인)에서 본 [신극장판 서(序)]는 기존의 팬들과 새로운 팬들 모두를 아우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쏟아 부은 새로운 극장판이다(괜히 제목에 ‘신극장판’이 붙은 게 아니다). 일단 그 문제의 ‘인류보완계획’이나 아담과 리리스, 롱기누스의 창 등에 대해 전혀 모른다 해도 [신극장판 서(序)]를 즐기기에는 별 무리가 없다. 아니, 사실 몰라도 된다. [서(序)]로 시작되는 신극장판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기존의 TV판 및 극장판과는 꽤 다를 것이고, 또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무식하다면 용감하다 해야 할지)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10년 전 처음 ‘에바’를 접하고 거의 충격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던 그때와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 때문이고, 에바를 만들어 낸 총감독인 안노 히데아키 역시 10년 전의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10년의 차이가 [서(序)]를 좀 더 ‘친절한’ 작품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겐도는 여전히 괴팍하고, 리츠코는 여전히 시니컬하며, 레이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고, 신지는 여전히 찌질하지만― TV판의 주요장면들을 긴박하게 재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서(序)]는 한결 여유롭기까지 하다. 혹자는 그 여유로움을 아무 변화없음으로 받아들이고 언짢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序)]의 알 수 없는 여유가 바로 [파(破)]를 위한 긴 숨고르기이자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였다는 것이 [파(破)]의 예고편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어쩌면 그 점이 바로 [서(序)]가 품을 수밖에 없는 한계점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팬들을 납득시키고 새로운 팬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10년이라는 세월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부딪히고 깨지며 한없이 내면의 늪에 빠져만 들어가던 신지에게 감정이입하며 함께 괴로워하던 10년 전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때의 나보다 한 발짝, 아니 다만 반 발짝만이라도 더 나아간 내가 있고, 또 그렇게 함께 나아갈 신지를 기대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가져다주는 선물. 신지에게도, 레이에게도, 아스카에게도, 카오루에게도, 그리고 안노 히데아키와 그때 다같이 열광했던 수많은 팬들에게도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축복. [서(序)]를 본 후의 이 안정된 느낌이 [파(破)]에서 어떻게 휘저어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서 더욱 두렵기도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만족과 기대감 속에 젖어들고 싶다.
2008/01/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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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パプリカ)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콘 사토시(2006)
제작: 매드하우스 제11회 PIFF 상영작/2006. 10. 14. 프리머스 2관 ![]() N.EX.T에 열광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날, 내가 잡지사 기자가 되어 N.EX.T 멤버들을 인터뷰하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꿈을 꾸는 그 순간, ‘아, 이건 꿈이다. 하지만 절대 깨고 싶지 않아.’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고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한번만 더 같은 꿈을 꾸게 해달라고 무척이나 빌었었다. 그 덕분인지 사흘 연속 멤버들을 인터뷰하는 꿈을 꾸는 데 성공. 그 이후로도 종종 나는 꿈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나 캐릭터(그것이 만화든, 영화든, 애니든)들을 만나는 꿈을 꾸곤 했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현실이 아닌 것, 그렇기에 그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바랄 수 있는 것, 바라기 때문에 언젠가 현실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주는 것. 비록 깨고 나면 잊혀질 허망함이라 해도. 현실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결코 현실은 아닌 것. 그렇기에 꿈을 시청각적 이미지로 옮긴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파프리카]는 분명 근미래의 과학적 기술과 이를 이용한 인간의 파괴적 욕망을 그 소재로 삼고 있지만 꿈과 현실의 모호함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기느냐에 더욱 주력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누가 보더라도 ‘이건 꿈이야!’를 외칠 수밖에 없는 화려한 이미지의 향연. 그래, 이것이야말로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하고 애니메이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겠지. 꿈이기에 우리는 현실에서는 감히 입밖에 내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말하고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 또한 허다하다. 무의식중에 그 꿈의 끝에 어쩌면 현실이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까. 정신의학연구소 연구원인 아츠코의 또 다른 자아인 18세 소녀 파프리카는 사람들의 꿈속을 드나들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두려움을 치료해주지만 정작 아츠코 자신은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꿈속에서도 말해보지 못한다. 그 와중에 아츠코가 속한 팀에서 개발한 DC미니가 팀원 중 한명에 의해 탈취당하면서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꿈이 비밀스러운 이유는 그 누군가와도 공유하지 않는 것인 동시에 한 사람의 내밀한 욕망이 물씬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꿈과 꿈이 서로 뒤섞이며 급기야 현실과 충돌하기 시작하자 세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돌변한다. 이제껏 감히 생각해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연이어 화면을 가득 메우며 관객들의 시선을 연신 붙들어 매고, 29세의 성숙한 여성과 18세의 발랄한 소녀의 간극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하야시바라 메구미를 비롯한 쟁쟁한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는 현실과 꿈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멋지게 해내는 콘 사토시 감독의 뛰어난 연출과 맞물려 관객들이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꿈에 우리가 그토록 매이는 것은, 꿈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발휘했던 용기를 깨고 나서도 다시 낼 수만 있다면, 영원히 깨지 않는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마지막 순간에 용기를 내어 결국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희망. 꿈이 단지 꿈으로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얼마든지 달콤한 현실로 되살려낼 수 있다는 진실을. 그래, 마치 아츠코처럼. 그러니 쉬지 말고 꿈을 꾸자. 그리고 용기를 내자. 언젠가는 꿈보다 더 멋진 현실을 맞을 날을 위해서. 2006. 10. 16. 2006/10/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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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검심(るろうに劍心) 추억편-십자상처에 새겨진 추억이라는 이름의 상흔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원작 : 와즈키 노부히로·슈에이샤 점프 코믹스
감독 : 후루하시 카즈히로 각본 : 소가와 세이지 캐릭터 디자인 : 야나기자와 마사히데 음악 : 이와사키 타쿠 애니메이션 제작 : 스튜디오 딘 히무라 켄신 : 스즈카제 마요 / 엄상현 유키시로 토모에 : 이와오 쥰코 / 윤미나 유키시로 에니시 : 사사키 노조무 / 김영선 카츠라 코고로 : 세키 토모카즈 / 양석정 솔직히 말해서 원작 『바람의 검심(るろうに劍心)』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다. 한때 본인의 미중년 레이더망에 걸린 사이토 씨 때문에 작정하고 읽어보려 한 적은 있지만, 집중해서 읽은 적은 없다는 얘기. 개인적으로는 썩 좋아하는 작품도 아니다. 막부 말 메이지 유신 직전의 일본사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무한 상황이니 작품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 무리다. 그래서 OVA로 나온 [바람의 검심-추억편]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추억편]만큼은 정말로 ‘좋아한다.’라는 것. [추억편]에서 가장 뛰어난 점을 꼽자면 역시 군더더기없이 꽉 짜여진 구성이라 하겠다. 어린 신타가 스승 히코 세이쥬로를 만나 켄신이라는 이름을 받는 데서부터 비천어검류의 수련과 스승과의 갈등, 하산, 그리고 쵸슈번에 몸을 담고 살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토모에를 만나고 십자상처를 얻게 될 때까지, [추억편]은 비교적 순차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의 흐름을 OVA 4부작 안에 아주 깔끔하게 담아냈다. 그러면서도 이케다야 사건과 교토대방화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놓치지 않고 밀도있게 다루는 한편 실존 인물인 카츠라 코고로와 다카스키 신사쿠, 신선조의 사이토 하지메, 오키타 소우지 등을 적재적소에 등장시켜 한결 그 무게를 더한다. 화면을 종횡으로 가르며 피보라를 뿌리는 켄신의 역동적인 칼놀림을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섬세한 작화, 이와사키 타쿠의 서정적인 음악, 여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혹은 애써 숨기는) 성우들의 나직한 목소리 연기,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며 역사적인 배경과 허구적 인물의 조화를 물 흐르듯 이끌어낸 감독의 연출력까지. [추억편]은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장점을 모두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두가 다소 길었지만, 역시 뭐니뭐니해도 [추억편]의 백미는 젊은 시절의 켄신과 그의 첫사랑 토모에이다. 심약한 이름이라 하여 그의 스승에게 새로 켄신(劍心)이라는 이름을 받고 비천어검류를 수련하던 켄신은 동란의 시대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에 스승과 결별하고 산을 내려온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긴 하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누군가가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카츠라 코고로의 설득에 켄신은 그를 따라 쵸슈번에 적을 두고 살수(人斬り抜刀斎)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어릴 적 자신을 감싸다 죽은 누나들과 도적들의 시신을 묻던 소년의 처연한, 그러나 강함이 어린 눈빛은 어느새 감정이 사라진 서늘한 살인자의 눈이 되어 눈앞에 뿌려지는 피와 발아래 쓰러진 시체들을 아무렇지 않은 듯 바라본다. 특별히 누군가와 친분을 나누지도 않고 정치적인 모임에도 뜻을 두지 않으며 오직 살수로서의 본분에만 충실한 그는 여느 때와 같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자신의 칼에 죽어가는 남자에 의해 한이 서린 흉터를 얻게 된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다시금 배어나오는 상처의 피를 닦아내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아니 더한 칼놀림으로 사람들을 베는 켄신. 그리고 그가 뿌리는 피보라를 그대로 맞으며 ‘정말로 피의 비를 내리게 하는군요.’라고 중얼거리는 토모에. 피비린내와 백매화향이 빗속에서 녹아들던 그날 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게 된다. 약혼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홀홀단신 교토까지 와서 켄신을 마주하는 토모에. 자신에게 상처를 남긴 자가 토모에의 약혼자임을 전혀 모른 채, 쓰러진 그녀를 거두는 켄신. 우연이라면 우연, 필연이라면 필연인 두 사람의 만남은 이제껏 한 길만 바라보았던 두 사람에게 다른 길을 틔워놓는다. 칼을 휘둘러 누군가를 죽임으로써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던 켄신과, 약혼자를 죽인 잔혹한 살인자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약혼자와 자신의 한을 풀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던 토모에. 이케다야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은 오오츠에 부부로서 함께 몸을 숨긴다. ![]() 작화, 음악, 연출, 연기. 어느 하나 모자란 구석이 없다. [추억편]에서는 토모에의 변화보다 토모에의 존재로 인한 켄신의 변화가 더욱 두드러진다. 지금까지 생명을 앗는 일만을 해오던 그는 토모에에게 함께 밭을 일구자고 하고, 여전히 칼을 품에 안고 잠들지만 토모에가 덮어주는 겉옷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온한 생활에 젖어든다. 한치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던 날카로운 살수의 눈―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던 차가운 시선은 어느새 어린 날의 신타의 눈빛으로 되돌아가고, 살수의 눈 아래 숨겨져 있던 켄신의 따스함을 받아들이는 토모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너는 내가 지킨다.’ 이제껏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통해서만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오던 켄신은 죽음이 아닌 삶의 길목에 서서 토모에에게 손을 내민다. 칼을 쓰는 법밖에 몰랐고 일단 칼을 들면 사람을 죽이는 것밖에 몰랐고 칼을 통해서만 세파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검은 흉기, 검술은 살인술’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그는 처음으로 살인이 목적이 아닌 다른 길을 찾고자 한다. 바로 그가 가진 단 하나, 칼의 힘으로. 그렇기에 ‘지킨다’라는 말은, 켄신이 토모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이자 애정표현이었을 것이다. 흐느끼는 켄신의 품에 안긴 채 토모에는 마지막 힘을 다해 약혼자 키요사토의 소도(小刀)를 손에 든다. 토모에가 어떤 행동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듯 켄신은 그녀를 향해 얼굴을 숙이고, 토모에는 키요사토의 소도로 십자상처를 남긴다. 깊은 한 때문에 멈추지 않던 피를 닦아주는 대신 그녀는 그동안의 사랑과 아픔을 담아 그들 사이의 업을 마무리한다. 켄신이 평생을 품고 살아갈, 추억이라는 이름의 십자 상흔을 남긴 채. 더 이상 그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토모에가 그가 앞으로 흘려야 했었을 마음의 피를 모두 닦아주었으니까. 그들의 만남은 칼로 빚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칼로 추억의 상처를 남김으로써 완성된다. 아마 켄신이 다시금 누군가의 곁에서 편히 몸을 뉘고 단잠을 청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에게 칼을 가지고도 죽음이 아닌 삶의 길을 열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가 다시 어릴 적의 그 눈빛을 되찾을 수 있게 해주었던 토모에에게, 그런 토모에를 ‘지킨다’고 말한 켄신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들의 만남과 사랑을 이렇게 가슴 속 깊이 담을 수 있게 해준 스태프에게도. 2006. 9. 15. 2006/09/1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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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十二國記)-나의 자리를 찾아서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원작: 오노 후유미
감독: 코바야시 츠네오(2002) 각본: 아이카와 노보루 제작: 스튜디오 피에로 갑자기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당신은 어디어디의 누구누구이니 저와 같이 갑시다'라는 내용의 작품은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모르는 곳에 뚝 떨어져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부대끼지만 진정한 자신의 힘을 자각하게 되고,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영웅이 되어 스펙터클 액션 러브 로맨스 어드벤처 시리즈를 줄줄이 찍어가며 결과를 성취하는 그 과정. 어떤 사람은 그 세계에 남는 것을 선택하고 또 어떤 사람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고 그렇게 다시 모든 것이 마무리되고. 그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대개의 경우 재미도, 기쁨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킬 수 있었고 때로는 감동한 나머지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참 좋은 작품을 봤다'라는 뿌듯한 만족감에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십이국기』의 경우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6화인가 7화까지는 더디기만 한 주인공의 각성에 좀이 쑤셨으며, 좀 지나서는 짜증나는 캐릭터(…스기모토 당신 말야) 때문에 주인공이 아니라 화면을 보는 내 이마에 핏발이 서는 것을 느꼈고, 「바람의 만리 여명의 하늘」 편에 들어서서는 스기모토 이상으로 짜증나는 뉴페이스가 2명이나 되질 않나…(스즈, 제발 그만 좀 울라구!!!). 다음편이 궁금해서 계속 다운을 걸어놓고서도 막상 보고 나면 어딘가 묵직한 것이 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목에 걸려있는 듯한 그 답답함에 애꿎은 보리차만 계속 들이켜야 했다. 왜 그랬을까? 『십이국기』는 내가 잊고 싶어하고 내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나'의 부정적인 것들을 계속 자극했다. 공포, 자기연민, 두려움, 파괴, 자기비하와 합리화. 요코가 수우도의 환상에 괴로워했듯이, 스즈와 쇼케이가 온갖 굴욕을 견디며 증오를 키워가다가 타인의 도움에 조금씩 의지해서 '진실'을 깨달아 가는 그것은,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나·의·현·실. '나'는 아니라고 애써 외면해 왔던 온갖 치부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이 작품을 대체 무슨 수로 '즐겁게', '재미있게' 볼 수 있단 말인가? 수우도의 환상은 어쩌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요코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적나라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봉래에서의 현실에 내가 존재할 수 없다면, 십이국에서의 나의 존재의 의미는 대체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이런 의문은 끊임없이 요코를 괴롭힌다. 내가 현실이라고 믿어왔고 의지했던 것들이 실은 나의 환상을 토대로 하는 모래성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밀려오는 자괴감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단 한마디로 다른 사람에게 지적 당하고 간파 당했을 때의 그 모멸감은?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만이 한데 뒤섞여 들끓었다면 진작에 이 작품을 보는 것을 관두었을 것이다. 천명을 받들어 모시겠다던 기린은 온데간데없이, 혼자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가던 요코는 라크슌의 도움으로 조금씩 이세계(異世界)인 십이국의 현실에 적응하면서 수우도의 환상을 제압한다. 그리고, 마냥 나약해지던 스스로의 마음까지도. 그리고 쇼케이와 스즈 역시, 진실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눈'을 틔워가며 눈앞에 닥친 현실을 정면돌파해 간다. 현실을 깨닫고, 나를 깨닫고, 타인의 도움과 조언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장'해 가는 것. 완전한 존재라는 것은 없다.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게서 배우고 자극 받고 깨달음을 얻고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 나의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 그렇게, 십이국의 세 소녀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찾아 두 발로 서게 된다. 『십이국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한다면 바로 천제가 내린 기린과 왕일 것이다. 분명히 왕기(王氣)가 있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명군이 될 가능성 역시 얼마든지 갖추고 있는 인물일 터. 게다가 그의 곁에는 자비의 화신인 영수 기린이 늘 존재한다. 그러나 기린과 왕은 때로는 파멸의 길에 접어들기도 한다. 하늘의 뜻으로 정해진 왕이면서도 타락하고 반란을 부르고 실도로 인해 기린이 병에 걸리고…. 주인이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인에게 거역하지 못하고 그를 따르는 기린이나, 기린의 충고를 무시한 채 막다른 골목으로 내달리는 왕을 보고 있노라면 제 아무리 하늘의 뜻에 의해 선택받았다 해도 자신의 의지와 마음을 굳게 다스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하계의 평범한 백성과도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느낄 수 있다. 신의 수명을 가지고 평생을 함께 하는 기린과 왕은 정신적 반려인 동시에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둘로 이루어진 '하나'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좋지만 상대를 가려가면서 하라'며 냅다 쿄우키의 뺨을 갈기고는 그 뺨을 쓰다듬어 주는 공왕 슈쇼우나, 500년 동안 함께 부대끼며 티격태격해온 엔키 로쿠타와 연왕 쇼류. 그리고 이제 막, 서로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고 앞으로 남은 긴 시간을 함께 하려 하는 경왕 요코와 케이키. 기린이 없는 왕이나, 왕이 없는 기린은 그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홀로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약하기만 한 그들이 그토록 칭송받고 백성이 우러르는 일국의 왕이며 기린이란 존재이다. '왕기는 있지만 명군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라는 케이키의 말처럼, 가히 '섭리'이자 '절대진리'라고 할 수 있는 운명적인 만남. 평생을 사는 것도 모자라 윤회를 거듭해도 있을까 말까한 그 만남을 이루어낸 이들이 바로 왕과 기린이다. 고결함과 순수함의 정수인 기린과 그를 대신해서 엄중한 처벌과 심판을 내리고 때로는 피를 묻혀야 하는 왕. 현명한 치세를 계속 펼치는 한 영원을 함께 할 이들이 주종 관계 이상을 넘어선 굳은 신뢰와 감정의 교류, 믿음을 나누게 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 방식이 어떻게 남에게 보여지든 간에 적어도 그 두 사람에게 있어서 만큼은 둘도 없는 소중한 것. 왕이기에, 기린이기에 더욱 결핍된 부분을 서로를 통해 보완하고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굳이 500년의 치세를 누리고 있는 안(雁)의 쇼류와 로쿠타를 예로 들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검집은 필요없다', '"나"라는 영토를 다스리는 스스로의 왕이 되어라'―. 다치고 또 부딪치고 장애물을 헤쳐 가며 몸소 얻은 깨달음을 경왕 요코는 초칙으로 만백성과 함께 나누려 한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스스로를 가다듬을 때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다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믿음과 의지를 나라의 본으로 삼는 요코. 그것을 신왕(新王)과 그의 충실한 기린이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 그리고 안국과 대국, 공국, 아직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다른 십이국의 저마다의 이야기들. 아마도 십이국에서는 제각각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쉴 새 없이 분주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조정을 정비하고 '경왕 세키시'라는 자기 자리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요코와 케이키처럼. 2003. 6. 12. 2005/11/26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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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그래, 가끔은 하늘을 보자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미야자키 하야오(2001)
각본: 미야자키 하야오 제작: 스즈키 토시오 미술: 타케시게 요우지 음악: 히사이시 조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치히로, 난 널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네 이름을 잊으면 안 돼!!" "하쿠, 네 이름은 코하쿠야!!" 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나는 만화 [음양사]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세이메이가 계속해서 친구 히로마사에게 충고를 해주던 그 말(별로 충고해 준 덕은 보지 못했지만-_-).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는 바로 이름이라는 것. 저주란 곧 사물을 속박하는 것이고, 사물의 근본적인 실제를 속박하는 것 또한 이름이라는 것. 이름이 '나'를 존재하게 하고 그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유바바의 온천장에서 치히로는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일을 하게 되고, 유바바는 자신이 내린 새 이름으로 온천장을 지배하며 꾸려나간다. 해가 저물고 온천장이 부산해지며 들썩들썩 하기 시작하면 강 너머에서 배를 타고 800여명의 신들이 목욕을 하기 위해 온천장을 찾는다. 맙소사, 이건 인력착취의 현장이다!(팜플렛에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절대진리의 문구가 고딕체로 적혀있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꼬마녀석이 커다란 대형목욕탕의 물때를 벗겨내고 생전 해보지도 않은 목욕시중을 들다니.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치히로, 아니 센 이 녀석이 그렇게 철딱서니 없는 녀석은 아니라는 것이다. 샐쭉해지기도 잘 하지만 근본은 착하다.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온천장에서 계속 일을 할 결심을 하고, 두려움은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겁이 많지는 않고 편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리기에 그만큼 깨끗하고 맑은 '눈'을 가지고 있다. 센의 이 때묻지 않은 맑은 시선은 하쿠를 유바바의 저주에서 구해내고 부모님과 함께 현실세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센에게는 언제 만났는지 기억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 모르게 애틋한 감정을 샘솟게 하는 기사님 하쿠가 붙어있지 않은가. 가마 할아범의 말대로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그들은 하늘을 날며 자유와 행복을 만끽한다. [원령공주]를 끝으로 은퇴하겠다던 미야자키 할아버지. 아니 그런데 미련을 못 버렸는지, '포스트 미야자키'가 아직 확고하지 않은 지브리를 염려했는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새 작품을 들고 역습을 강행한다. 결과는 할아버지의 대성공. 애니메이션 최초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따내고 일본에서는 장장 8달 동안 흥행행진을 계속한다. 신문지상에서 실컷 떠들어댄 이 기사문구를 구태여 여기서 반복하는 이유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객관적인 문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재미있다. 그만큼 연출, 기술, 음악, 뭐 하나 나무랄 것이 없다. 이미 익숙한 정겨운 스스와타리부터 뉴페이스 카오나시까지 낯설지만 귀여운 요괴 대행진은 연신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고, 온갖 쓰레기를 안에 품고 오물신이 되어 버린 강의 신을 보고 있자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늘 강조했던 환경친화적 메시지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모든 것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십분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웃의 토토로]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같이 순간 순간 보여지는 '격렬함'은 다소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말 그대로 이 작품은 유(柔)하고, 차분하고, 흐름이 완만하다. 손을 꼭 쥐게 만드는 대신, 왈칵 울음을 터뜨리게 하는 대신 계속해서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작품이다. 격한 감정의 굽이굽이를 느끼게 하는 작품도 멋진 작품이고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볼 수 있다는 것도 관객으로서는 멋진 일이지만, 이 느긋함이 '늘어지지 않게' 2시간 여의 러닝타임을 채워나가야 하는 연출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상당히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슬슬 툇마루에서 양갱을 오물대고 차를 마시며 손자들의 재롱을 즐길 법한 나이에 이른(1941년 생이니 조금 이를지도 모르겠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관조적인 시선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숱한 작품을 만들어 오면서 자연스레 터득한 흐름의 굴곡. 아이에게는 연신 귀여운 캐릭터와 따스한 음악으로 주의를 붙들어놓고 어른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게 한다. 게다가 일본 고유의 목욕문화와 요괴들과 함께 온천장 주인인 마녀 유바바의 푸른 레이스 드레스, 유바바의 방의 꾸밈새 같은 서양적 요소가 전혀 이질감을 느낄 새도 없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이것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능력이라면 능력일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터널을 빠져나온 치히로는 몸을 돌려 터널 건너편을 바라보지만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다. 치히로의 머리칼에 묶여있는 보랏빛 머리끈만이 꿈과 현실을 이어줄 뿐. 치히로의 꿈은 우리가 한번씩은 꿈꿔봤을 바로 그것이고, 인간의 시공간으로 돌아온 치히로의 기억 깊은 곳에 숨어있을 것이다. 완벽하고 애틋한, 그러나 슬프지만은 않은 한 편의 동화. 구박하던 유바바, 따스하게 격려해 주던 제니바, 늘 센을 도와주던 린과 가마 할아범, 귀여운 요괴들. 그리고 그 '언젠가'를 기억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고 있을 하쿠. 미움, 고마움, 따스함, 그리움, 그리고 사랑.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한 감정의 단편적인 조각조각들이 함께 이어 붙여질 때 사람들은 더욱 큰 감동을 받게 된다. 센은 하쿠를 만났고, 현실로 돌아온 치히로는 알게 모르게 하쿠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푸른 하늘에서 두 손을 맞잡고 함께 날던 하쿠와 센을 나는 또 다시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이 꿈속일지, 아니면 길을 가다 하늘을 올려볼 때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2002. 6. 30. 2005/11/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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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여우(千年女優 Millenium Actress, 제 6회 PIFF 상영작)-집착이라 해도 아름답다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콘 사토시 (2001)
각본: 콘 사토시, 무라이 사다유키 음악: 히라사와 스스무 제작: 매드하우스 나는 콘 사토시 감독의 전작 [퍼펙트 블루]를 보지 못했다. GV 시간 때 전작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는 감독의 말을 듣고 새삼 [퍼펙트 블루]를 진작에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글쎄, 전작을 보았다 하더라도 [천년여우]를 보고 느낀 그 뿌듯함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배우로서의 전성기를 한껏 누리다가 돌연히 모습을 감춘 전설 속의 여배우 후지와라 치요코. 메이저 영화사에서 치요코의 다큐멘터리 제작을 의뢰받은 타치바나 겐야는 치요코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젊은 카메라맨과 함께 치요코가 살고 있는 깊은 산속으로 찾아간다. 치요코의 팬임을 자처하며 그녀를 늘 그리워했던 타치바나는 치요코에게 그녀의 추억의 물건을 건네주고, 치요코는 그 물건-'열쇠'를 손에 쥐고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의 장면들이 순식간에 화면을 뒤덮은 후, 관객들은 어느새 그녀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게 된다. 학교를 파하고 열심히 집으로 뛰어가는 그녀를 뒤쫓는 것은 다름아닌 '치요코 님~'을 외치는 타치바나와 카메라맨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다만 고향이 홋카이도라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 아는 치요코의 첫사랑. 그가 지니고 있던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의 대답을 내일로 미루었으나 결국 치요코는 첫사랑의 행방을 놓치고 만다. 그가 남긴 열쇠를 목에 걸고 그를 찾으리라 다짐하는 어린 치요코. 만주로, 다시 일본으로, 전후에는 계속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계속 성공을 거두지만 그녀의 머릿 속에 있는 것은 오직 첫사랑을 찾겠다는 굳은 다짐 뿐이다.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는 모두 '그'를 찾는 과정이고, 영화의 내용은 그녀가 실제 처한 상황과 교묘히 맞물리게 된다. 또한 치요코 자신이 태어났을 때, 중요한 결심을 하는 전환점, 감정이 격해지는 장면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은 작품의 흐름을 끊어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트러진 호흡을 되살려주는 역할을 수행한다(개인적으로 '지진'을 이용한 연출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옛날을 회상하며 재연하는 치요코와 그녀를 도와주는 타치바나, 그리고 철저히 제 3자의 입장에서(관객의 입장을 대변한다고도 볼 수 있을) 카메라맨의 존재. 이 3명은 애니메이션의 탄탄한 축을 이루며 쉼없이 그 내용 속에 집중하게 하며 과거와 현실, 환상의 교묘한 중첩 사이에서도 헤매지 않도록 관객을 이끌어간다. 사랑하는 이를 찾는 만주의 종군간호사, 사랑하는 영주를 되찾으러 갑옷을 입고 적의 성으로 진격해 가는 공주, '그'의 행방을 쫓는 여자닌자, 메이지 시대의 기생, 급기야는 달로, 우주로까지 '그'를 찾으러 떠나는 치요코의 영화. 그것은 치요코의 인생 그 자체이기도 했다. 매번 자신의 목에 걸린 '열쇠'를 손에 꼭 쥐고 끝없이 달리는 치요코. 그가 탄 기차를 쫓아서, 나중에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홋카이도의 눈밭을 달리는. 결국 '달리는 것' 이외에 치요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채 막연히 자신의 그 애틋한 감정에만 의지할 뿐이다. 영화 속에 나타난 물레를 돌리는 유령 또한 그녀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두려움, 언젠가는 자신도 그도 나이를 먹고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볼 수 없으리라는 당연한 시간의 흐름이다. 그녀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열쇠도 사실 그녀의 마음을 상징화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라도 내 버릴 수 있었을 열쇠. 그저 '소중한 것을 여는 것'이라는 그의 단 한마디에 의지해서 자신도 그 열쇠를 소중히 여기지만, 어쩌면 그것은 치요코의 집착이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라는 것은 내 생각이고, 감독 본인도 열쇠의 원래 의미는 관객 개개인의 몫이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열쇠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객에게 맡긴 것과는 달리, 마지막 치요코의 환상은 치요코 자신의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죽음을 앞두고 열쇠를 손에 쥔 채 조용히 눈을 감는 치요코. 곧 그녀의 환상은 우주선을 타고 달이 아닌,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막막한 우주로 향한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우주선 안에서 결국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녀(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이 치요코의 대사와 같았기에 내심 기뻤다). 사실은 그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지만, 어쩌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집착. 죽음에 이르러서 그것을 인정하게 된 치요코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우주로 날아간다. 그녀의 아픈 과거에 함께 슬퍼하는 타치바나와 카메라맨을 남긴 채.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측면에 있어서는 아는 것이 없기에 할 말이 없다(그러나 실사 사진을 적절히 이용한 장면과 치요코가 어린 시절의 사진, 특히 인형을 뒤에 둔 사진 등에 있어서는 잘 모르는 나로서도 정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출은 어떠한가. 그닥 화려하진 않아도 정말 실재하는 듯한 그 생생한 캐릭터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칫하면 현실과 허구 사이의 함정에 스스로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모두 감수하고서도 안정된 연출로 관객을 사로잡는 콘 사토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낼 뿐이다. 꼬리> 역시 과외는 조금 늦겠다고 전화를 하고 사인을 받았어야 하는 것이었다. T.T 2001. 12. 1. 2005/11/2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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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린다-잔잔한 바다물결같은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모치즈키 토모미 (1993)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작화감독 / 캐릭터 디자인: 콘도 가츠야 처음 이 애니를 본 것은 고 3 수능을 마치고 난 후였다. 생각처럼 나오지 않는 점수 때문에 초조해서 그랬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 당시에는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리카코는 왜 다른 애들을 다 놔두고 타쿠에게 돈을 빌렸으며, 타쿠와 리카코가 왜 서로 뺨을 때렸는지 등등. 특히 리카코의 태도는 여자인 나로서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한 마디로 '내가 봐도 정말 싸X지 없다-!!'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사람은 시간이 지난 후에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대학에 들어와 1년 정도 지난 후에 우연한 기회에 다시 보게 된 [바다가 들린다]는 예전의 기억과는 완전히 틀렸다. 새삼 귀에 와 닿는 잔잔한 음악과, 타쿠와 리카코의 미묘한 표정 변화, TV 화면 가득히 넘쳐 흐르는 그 따스함. 주위의 시끌벅적함도 이내 귓전에서 멀어지고 정신없이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따라가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지방 코오치에 갑자기 등장한 리카코는 순박한 시골 아이들 속에서 단숨에 소문거리가 된다. 얼굴도 예쁘고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지만 덕분에 너무 튀어서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질투와 뒷말의 대상이, 남자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 때까지 리카코와 타쿠는 서로 직접적으로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다. 타쿠의 절친한 친구인 마츠노가 리카코를 좋아하기에 그 둘 사이의 중개자는 마츠노이다. 가장 친한 친구의 옆자리를 여자가 차지한다는 것에 반감이 생긴 탓일까, 타쿠는 '너의 장점을 여자 따위가 알 리가 없어!'라며 리카코에 대해서 제대로 알 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문을 통한 리카코의 외적인 모습만 접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이더냐. 하와이로 수학여행을 가서 인사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리카코가 난데없이 돈을 있는대로 빌려달라고 한다. 얼떨결이긴 하지만 순순히 돈을 빌려준 타쿠. 외적인 모습이긴 해도, 아이들의 수군거림 속에서도 당당해 보이던 리카코에게 처음부터 끌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츠노에게 왜 말했냐며 따지고 드는 리카코를 보고 '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라고 투덜대면서도, 해가 바뀌도록 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도 아무 말 없는 타쿠. 그러나 아버지를 만나러 도쿄에 가려는 리카코를 차마 혼자 보내지 못하고 따라가고, 그 때부터 리카코와 타쿠는 도쿄에서의 짧은 시간을 함께 공유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품는다. 처음으로 타쿠가 보는 리카코의 약한 모습과 리카코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타쿠의 따스한 배려. 하지만 그들 역시 어린 탓이었을까. 도쿄에서 돌아온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서로를 무시하고 만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 역시 깊이, 묻어버린다. 분명히 타쿠 자신도 리카코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큰 걸림돌이 있다. 바로 친구 마츠노의 존재. 중학교 시절부터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각별한 사이가 된 그 친한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를 자신도 좋아하게 되버린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다. 그렇기에 리카코에게 고백했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는 것을 마츠노에게서 듣고 당장에 리카코에게 달려간 것이다. 그 순간 타쿠가 느낀 분노는 제일 친한 친구가 느꼈을 참담함과 함께 그에게 진실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분노가 함께 끓어올랐는지도 모른다. 진심을 고백해보기도 전에 일은 더욱 커져서 급기야 학교 축제날 타쿠는 리카코의 눈물을 보게 된다.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추궁당하는 리카코를 보고 당황한 타쿠 못지 않게 리카코는 추궁당한 모습을 타쿠에게 보인 것에 더욱 당황해한다. 아마 리카코 역시, 호감을 느끼고 있던 타쿠에게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다른 여자애들처럼 웃고 떠들고, 당당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욕조에서 잠이 드는 사람. 그리고 언제나 도쿄를 그리워하던 사람. 그렇기에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두 사람. 솔직하게 서로에게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지하철 승강장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살풋 웃으며 인사를 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듯, 이것이 처음이라는 듯, 이제야말로 당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는 듯. 잔잔한 코오치의 바다물결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코오치성의 불빛처럼, 진심을 묻어둔 채 조용히, 천천히 깊어지는 타쿠와 리카코의 마음. 그런 마음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그들도 어렸고 그것을 미처 이해 못 한 나도 어렸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래서 그 때를 조용히 돌이켜 본 다음에야 아아 그랬었구나, 라며 슬며시 웃을 수 있는 그런 마음.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다만 그 담담함에 흠뻑 취해있고 싶다. 2001. 12. 1. 2005/11/2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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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토토로-정겨움보다는, 이제는 슬프다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88)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이웃의 토토로]. 이미 볼 사람은 다 보았다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여럿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애니메이션. 그러나 역시 극장판은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본인으로서는 보고 싶었던 여럿 영화들을 다 제쳐두고서라도 꼭 봐야 한다는 고집이 있었고, 결국은 '이왕 나서는 거 지하철 2호선도 타보고 새로 생긴 롯데 시네마에 가서 보는 거야!!'라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역시 백화점은 백화점. 세일 기간이었는지 사람들은 넘쳐나고 롯데 시네마 매표소의 긴 줄은, 그리고 그 줄 밖에서 엄마를 부르며 뛰어다니는 그 수많은 꼬마들은 영화 상영 2시간 전부터 나를 암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것. 내 성질머리가 그 꼬마들의 괴성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수적으로 밀리고 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입장이 시작되어 들어가보니 상황은 더욱 점입가경. 학원에서 단체 관람을 왔는지 인솔교사 3명이서 40여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어른끼리 입장한 사람은 나와 친구를 포함해서 단 6명. 이 되바라진 꼬마 녀석들은 '나 저거 책으로 봤다. 토토로는 어른 눈에는 안 보인다'라면서 자기들끼리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고, 오프닝 화면에서 메이가 걸어갈 때에도 '토토로는 언제 나오는가'에 대한 심각한 토론들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 마음을 비워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_-++ 그러나 정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20번은 넘게 본 작품인데. 학교 상영회를 할 때도 보았는데. 그저 따뜻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프닝 장면부터 그렇게 눈물이 나는건지. 넓게 펼쳐진 논과 밭, 푸른 나무들, 삐걱거리는 낡은 집, 논일을 하다 손 흔들어주는 마을 사람들, 냇가의 올챙이. 그 모든 것들이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냥 마음 아프게만 느껴졌던 것은 과연 무슨 이유인지. 계속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 끝으로 누르다가 결국은 메이와 사츠키가 토토로와 함께 나무를 키워내는 장면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훌쩍거리며 휴지를 찾으러 뒤적이는 나를 보면서 친구는 '그렇게 감동했어?'라고 묻고 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아니, 그건 감동이 아니었다. 분명히 너무 슬펐고, 그래서 그저 코를 훌쩍거리며 울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녹나무 앞에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말한다. '먼 옛날에는, 나무와 사람은 친구였단다' 그렇다. 이제는 '먼 옛날'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메이가 기어들어가는 긴 나무터널도, 토토로를 찾기 위해 뛰어다닌 커다란 나무 등걸도 이젠 우리 곁에 없다. 할머니가 손수 키운 채소들을 흐르는 냇물에 담그어 두었다가 맨입으로 서걱서걱 베어먹는 그 익숙한 풍경도 이젠 불가능하다. [이웃의 토토로]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인 풍경들이 지금에 와서는 과거의 추억으로만 존재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이제 나는 눈 앞에서 토토로가 지나간다 해도 토토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고, 토토로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그 아이들을 마냥 부러워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나이가 되어 버렸다. 아직 엄마의 품이 그립기만 한 사츠키와 메이. 메이에게 있어서 마치 엄마와도 같이 보살펴주는 꿋꿋한 사츠키도 엄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손에 움켜쥐고서는 울음을 터뜨린다. 괜찮을 거라고 다독거리는 할머니 앞에서 전에도 그랬다며, 돌아가시면 어떡하냐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츠키. 하지만 엄마에게 드릴 옥수수를 품에 안고 '언니 바보!!'라고 외치며 울부짖는 꼬마 메이 앞에선 마치 내가 사츠키가 된 것처럼 난처해졌다. 없어진 메이를 찾아 부르튼 맨발로 흙길을 달리는 사츠키를 보면서 내가 달리는 것처럼 숨이 가빠지고 또 다시 울먹거리고, 그리고 토토로를 찾아 헤매고. 커다란 스크린 속에서 메이를 찾아 달리는 사츠키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러나 뭐라 해도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한밤중에 사츠키와 메이가 토토로와 함께 나무를 키워내는 장면이다. 한밤중에 큰 토토로가 아빠의 우산을 들고 작은 토토로들과 함께 씨앗을 심어놓은 곳을 맴돌고 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들은 함께 토토로들과 씨앗을 키워낸다. 씨앗은 금새 움이 터서 한 줄기 두 줄기 씩 잎을 키우고 가지를 뻗치고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숲의 정령들과 아이들이 함께 이루어 내는 조그마한 기적. 꿈이지만 꿈이 아닌, 그 때라면 그 아이들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그 아름다운 환상은 이제 그저 그 스크린 안에서 밖에 만날 수 없는 환상이 되어버렸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부럽지만 나는, 우리는 해낼 수 없는 그 옛날의 추억. 미야자키 하야오가 과연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마을에서 전화가 있는 곳이 한 집 밖에 없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없어진 아이를 찾기 위해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는 시절, 그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 예전에 조그만 TV 화면에선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그 풍경은 극장의 스크린 속에선 이제 안타까운, 돌이킬 수 없는 지나버린 과거로 비춰졌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저 따스한 이야기로만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을. 토토로의 푹신한 품과 귀여운 꼬마 토토로들, 신기한 고양이 버스만을 기억하고 싶다면 그저 비디오 화면으로 보고 만족하면 된다. 만약 극장에서 다시 그들을 만난다면, 그 따뜻함이 더욱 커질 거라는 기대는 섣불리 하지 않는 게 좋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욱 좋을 때도 있는 법.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개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나고 싶다. 내가 만약 비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서 토토로를 만난다면, 빗물이 저절로 굴러 내리는 자동 3단 우산을 줄 수 있을 텐데. T.T 2001. 8. 10. 2005/11/2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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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프린세스-건조한 일상을 촉촉하게 바꿔주는 그 무엇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미셸 오슬로 (1999)
각본: 미셸 오슬로 이 애니메이션은 동화(童話 : 어린이를 위하여 지은 문학작품, 혹은 그런 이야기)다. 혹은 우화(寓話 : 다른 사물에 비겨 의견이나 교훈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다. [키리쿠와 마녀]에서 볼 수 있었던 미셸 오슬로의 독특한 감각과 재능은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캐릭터와 도저히 실루엣 애니메이션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교한 화면, 그리고 독특한 유머. 아이들이 가득한 혼잡한 일요일의 상영관 내에서 나는 이 작품에 숨돌릴 틈 없이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첫 에피소드인 왕자와 공주 이야기는 흔히들 들어온 이야기이다.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공주를 구해내는 왕자의 이야기.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공주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왕자를 비웃지 말자. 이런 점에서 [프린스 & 프린세스]는 완벽한 동화다. 이런 단순한 내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풀숲에 떨어져 빛나고 있는 수많은 다이아몬드다(이 장면을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써보다가 결국은 유리판에 마가린을 발라 빛을 투과 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미셸 오슬로는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는 관계로 그림자 애니메이션을 택했고 총 8개의 에피소드를 만들었는데 본편에는 배급자가 선택한 6편의 작품만이 선택되었다(참고페이지-씨네21).남자와 여자는 서로 이야기를 생각해내면서 자신이 분장할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늙은 기사는 그들을 위해 무대를 마련해준다. "괜찮아, 왕자와 공주만 있다면 무슨 이야기든 만들어 낼 수 있어"라는 늙은 기사의 말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약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왕자와 공주, 마녀와 평범한 청년, 여왕과 그녀에게 무화과를 갖다 바치는 소년, 잔인한 여왕을 사모하는 조련사. 그들은 나란히 책상에 앉아서 평소처럼 시간을 보내다가 왕자와 공주 이야기로 시작한 그들의 상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중세 유럽, 19세기 일본, 미래에 이르기까지 전차원을 종횡무진하며 이야기를 끌어낸다. 왕자와 공주라고 해서 무조건 해피엔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천편일률적으로 옛날 이야기를 답습하는 것도 아니다. 마녀의 성 앞에서 퍼부어지는 공격을 보면서 생각에 잠긴 청년은 칼을 버리고 "들어가도 될까요?"라면서 마녀의 허락을 구한다. 치마를 걷고 계단을 뛰어오르며 자신의 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마녀의 모습을 보면서 마냥 유쾌하게 웃을 수만은 없는 그 아련한 느낌을 청년은 알아차린 것일까? 성 안을 구경하면서 청년은 마녀의 지성과 따스한 배려,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공주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키리쿠와 마녀]에서도 키리쿠가 마녀가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청년 역시 1:1로 대등한 위치에서 마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 마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 고정관념처럼 박혀버린 마녀=악의 구분을 믿지 않고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는 청년의 모습은 동화라기보다 차라리 우화에 더 가깝다. 19세기 일본의 판화가 호쿠사이(참고페이지는 이 곳)의 그림에서 출발한 에피소드는 입가에 맴도는 웃음과 함께 이 애니메이션을 만든 이들(감독을 포함한 8명의 애니메이터가 이 작품에 참여하였다)의 실험정신도 돋보이는 장면이다. 도둑의 등에 업혀 에노 마추바라에서 후지산에 이르기까지의 경치를 구경하는 노파 오이꼬와 함께 관객들은 호쿠사이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에 접하게 된다. 약 10여분의 짤막짤막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부엉이 머리가 째깍째깍 돌아가면서 "1분간 휴식시간입니다"라는 제작진의 유머 또한 더없이 만족스럽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지막의 10분간의 키스타임은 폭소 그 자체이다. 서로의 사랑을 맹세하면서 키스한 왕자와 공주는 상대가 동물로 변하는 순간 진저리를 치며 자신의 사랑을 부인한다. 고래에서 벼룩같은 극과 극을 달리며 그들은 본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계속 키스하지만 결과는 성(性)이 뒤바뀌어 버린다. 왕자로 변한 공주가 "괜찮군요, 이제 성에 돌아가요"라고 하자 그렇게는 못한다며 난리치는 왕자. "괜찮아요, 내가 사냥을 나가고 당신은 바느질을 하면 되요"라고 공주가 말하자 왕자는 "난 바느질을 못한단 말이오"라면서 도리질을 친다. 그 순간 공주의 직격타-"배우면 되죠!!!"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는 이 통쾌함!! 그렇다, 배우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장면만큼은 세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 도시의 야경과 함께 남자와 여자, 늙은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상상력의 자취를 함께 좇는다.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왕자와 공주가 진부하다고 생각되면 우리의 상상력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가끔씩 생활이 지겨워질 때마다 친한 몇 명과 함께 연습장을 꺼내 들고 함께 끄적여보고 싶다. 2001. 5. 22. 2005/11/2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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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짧은 생각 [창고/애니, 쉼없는 동경]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97)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말 그대로, 한 면만 본 짧은 생각. 옛날 일본의 얘기. '그래서 산이랑 아시타카는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란 맺음말이 어울리는 그런 애니메이션. 보통 우리나라의 옛날 얘기들은 다 권선징악에 충실한 이야기들이고 일본의 전래되어오는 얘기들도(이를테면 '복숭아 동자'같은 그런 얘기들) 다 비슷한 양상이지만 세기말에 다시 재현되는 이 옛날 얘기는 조금, 다르다. [모노노케 히메]에는 절대적 악(惡)이란 것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으로 자연이 파괴되기는 하나 적어도 이 애니메이션에 있어서만큼은 그 욕망이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있어서 똑같은 비중을 지니고 있다. 바로 삶에 대한 집착과 욕구. 다만 그들이 대립하는 것은 서로의 입장이 상반되어 있기 때문이다.제철소 사람들은 누가 강요해서 제철소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생명을 서로에게 의지하는 가장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그 공동체에서는 누구든지 평등하며, 권력과 지위에 의한 약자도 없고,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도 없다. 말 그대로의 진정한 공동체. 그리고 이 공동체의 중심이자 정신적인 지주는 바로 에보시이다. 그녀가 사람과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은 그녀가 이끄는 공동체에 그대로 투영된다. 그녀는 바깥세계에서 팔려갈 신세이던 여자들을 데리고 들어와 자신의 삶을 개척하도록 도와주며, 병자와 약자들도 한 주체로서 인정해주며 공동체에 합류시킨다. 에보시는 제철소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자신이 지고 있는 그 책임들을 기꺼이 수행한다.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 산을 파헤치고 동물들을 죽인다. 그러나 아시타카는 분노는 하되 비난은 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살길을 개척해 나가는 또 다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이기에 에보시와 제철소 사람들은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물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로와 옷코토누시 일족이 그토록 맹렬히 저항하는 이유도 인간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생명을 걸고서 하는 싸움이기에 그들의 저항은 더더욱 처절하나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정·되·어·있·는 죽음이다. 그 죽음 앞에서 동물들의 분노는 재앙신이라는 극도의 결과로 치닫게 된다. 모로의 경우 그 분노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인간이지만 친딸로 여기며 키워온 산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당장 눈앞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핏덩이까지도 내던지고 달아나 버리는 인간이라는 족속에 대한 경멸과 분노. 결국 모로의 분노는 산에 대한 사랑으로 돌려지고 그는 산을 구해내고 죽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개입은 필수적이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얻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이 생기지만 인간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선을 넘어버린다. 균형점이 깨지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모든 생물의 죽음이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 인간은 다시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그리고 해결할 수밖에는 없다. 이미 동물들은 인간에 의해 다 죽어버렸으므로). 인간이 처음부터 자연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모든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단 재앙이 시작되고 난 후에는 다시 그 재앙에 관여하게 된다. 그 재앙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여기서 [모노노케 히메]가 넘지 못했던, 그러나 넘어서는 안되었던 벽이 나타난다. 과정적으로든, 결과적으로든 생명의 회생에 인간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슴신의 목은 아시타카에 의해 돌려지게 된다. 비록 산이 그 자리에 함께 있긴 했으나 그녀는 모로 일족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그리고 그 사실은 모로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라도 회생할 수 있지만 그 정도가 돌이킬 수 없을 때에는 인간의 도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인간이 시작한 것이니 그 끝도 인간이 거두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 수많은 동물들의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들의 죽음은 생명의 회생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지 재앙의 비참함만을 더해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과적으로는, 모노노케 히메가 인간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는 늘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굳이 [모노노케 히메]만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는 남성이며,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지녔고, 건전하고도 냉쳘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때로는 과격해질 수도 있는 행동력을 갖춘 만·능·소·년 아시타카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완·성·되·어·있·는 거의 완벽한 인격체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모노노케 히메는 존재하지 않으며 한낱 들개소녀만이 들개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그의 말 한 마디―"당신은 아름다워."라는 말 한마디는 사슴신의 목보다도 더 큰 위력을 자랑한다). 소년과 소녀의 알 수 없는 감정의 교류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저 그런 스토리로 전락할―안 그래도 뻔한 내용인 것을―위험을 가중시킨다. 이것 역시 모노노케 히메가 전하는 또 다른 교훈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시타카, 그의 이미 성장해버린 완벽함에 찬사를. 그리고 그로 인해 회생의 기회를 가진 자연에 축복을. 2000. 12. 23. 2005/11/26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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