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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미쓰 홍당무 
2008/08/11   다크 나이트(Dark Knight)  (4)
2008/06/18   섹스 앤 더 시티(200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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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5   빨간구두(2004, Non ti muovere: Don't move)  (4)
[더 로드], 짤막하게.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혹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말이 필요없는 경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우, 짤막한 음절 하나도 내뱉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게 되는 경우. [로드]는 아마 그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원작이 주는 느낌이 너무나 강력하기에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 같지만, 내가 느끼기에 영화는 원작을 최대한 존중하려 애썼고 원작의 내러티브에 비교적 충실한 편이다. 원작보다 앞서가는 부분도 없으며 원작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지레짐작으로 먼저 둘러가는 부분도 없다. 원작에서 끊임없이 묘사되는 잿빛으로 가득 찬 세상과 절망이, 영화 속에서는 날선 폭력과 끔찍한 사체로 적나라하게 치환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시청각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내는 장면들은 철저히 원작의 묘사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쉽사리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 제작사 입장에서) 어찌 보면 모험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절제이기도 하다.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한 아버지의 맹목적인 부정에서 비롯된 액션 활극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을 이 영화는 덕분에 중도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온몸을 찢는 듯한 극심한 진통보다도 희망이 사그라진 세상에 아이를 내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에 여자는 더욱 고통스러워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두고 남자는 한층 삶에 집착하고 여자는 언젠가 다가올 파괴와 죽음 앞에서 한발 먼저 등을 돌리고 싶어 한다. 어느 쪽이 옳은가. 어느 쪽이 그른가. 자신의 분신이 내 눈앞에서 찢겨나가는 것을 보느니 먼저 죽고 말겠다는 여자의 소망과 그럼에도 나보다 단 한순간이라도 더 살아주기를 바라는 남자의 소망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울까. 원작에서 마치 고해라도 하는 것처럼 매순간마다 삶과 죽음, 그 모두와 동등한 무게를 지녔던 대화들이 영화 속 배우들의 입에서 읊어지는 그 순간, 기뻐하면서도 그들처럼 똑같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 그만큼 영화 속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를 원작이 이르는 경지 언저리까지 (순간이나마)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고통과 슬픔이 점철되어 피로가 덧씌워진, 언제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비고 모르텐센과 한없이 불안하고 연약해보이면서도 순간순간 세계에 대항하는 의지를 내보이는, 상상한 것 이상으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코디 스밋 맥피가 엮어내는 감정의 실타래는 부자지간을 넘어 그야말로 죽음의 장벽을 넘어 함께 진군하는 전우애와도 같은 감동을 전해준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을 가르치고,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타인에게 총구를 겨눌 때 망설이지 말 것을 가르쳐야만 하는 세계에서 남자는 끊임없이 빛바랜 희망을 전하려 한다. 모든 것이 죽어 마땅한 현실 속에서 남자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하여 아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운다. 추위와, 고통과, 살아남은 또 다른 사람들과, 과거의 아스라한 추억과, 그리고 때로는 절대선(善)을 주장하는 아들과도 싸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희노애락의 감정이 생존이라는 절대명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 순간에도 남자는 코카콜라 한 캔을 찾아내어 소년에게 건넨다. 생동감 넘치는 선명한 붉은빛, 탄산음료 특유의 향취, 톡 쏘는 청량함과 달콤함…. 살아남는다면 아마 두고두고 되새기며 또 다른 코카콜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그 무엇이 어쩌면 남자가 소년에게 끊임없이 얘기하고팠던 희망인지도 모른다.

남자가 아들을 두고 먼저 눈을 감아야 하는 그 순간.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또 다른 남자의 등장. 혹자는 다소 생뚱맞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함께 영화를 본 smk군의 반응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 ‘생뚱맞음’ 덕분에 작가는, 남자와 소년은, 그리고 원작과 영화를 접한 이들은 구원을 얻는다. 지켜줄 이 하나없이, 나의 분신을 홀로 두고 먼저 세상을 떠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잠든 소년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하던 남자에게도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미친 것이다. 맞다. 그것은 남자의 욕심이고, 작가의 욕심이다. 내 손을 떠난 아들의 삶에 비춰질 또 다른 한 줄기 빛. 원작/영화를 보는 내도록 숨죽여 기다리고 또 기다린 그 ‘희망’이 형태를 갖추어 나타난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가 과연 나 혼자만일까? 그것이 지나친 바람인가? 그것이 섣부른 결말인가? 모든 부모들이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이 바로 ‘그’ 희망이 아니던가. 신은 비록 한번 이 세계를 버리셨으나, 그럼에도 또 다시 손을 내밀어주시고 우리는 그 은총을 입기 위해 늘 기도한다. 부디 살아남아, 지금의 이 현실을 박차고 나갈 힘을 얻기를. 삶의 매 순간순간들이 그 힘의 바탕이 되어줄 수 있기를. 하늘도 땅도 공기도 잿빛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남자가 그토록 당부했던 불씨를 품고 발걸음을 내딛는 소년처럼. 신이여, 부디 이 아이를 보호하소서. 당신께서 전하시는 바를 오롯이 품고 있는 이 아이를, 부디.


2010. 8. 13.



2010/08/13 17:29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2
미쓰 홍당무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 이경미(2008)
주연 : 공효진(양미숙)
         이종혁(서 선생)
         서우(서종희)
         황우슬혜(이유리)
         방은진(성은교)


고등학교 러시아어 교사인 양미숙. 머리는 늘 부스스한 산발머리에 머플러와 모직코트, 짙은색 스타킹으로 온몸을 칭칭 둘러싸고 앙칼진 목소리로 동료 교사이자 은사인 서 선생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아니, 고백이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러나 정작 공격의 대상이 된 서 선생은 동료 교사이자 제자인 양미숙이 대체 무슨 의도로 자신에게 이러는지 어리둥절해 하며 슬쩍 외면하기 일쑤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라는 속담의 대표적인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옛 은사이자 동료 교사에게 연정을 품는 20대 후반의 여성은 흔하다면 흔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정작 그 인물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에 이르면 양미숙이라는 캐릭터는 감독이 설정하기에도, 배우가 연기하기에도, 관객이 이해하기에도 결코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저 사모한다는 이유로 핸드폰 문자질에 전화질에 스토커 수준의 집착까지 보이는, 그럼에도 상대방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는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거라며 피부과 전문의 앞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나 동료는 전무하고 학생들에게도 늘 무시당한다. 주변과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으로 양 뺨을 빵빵하게 부풀린 것도 모자라 그 두 뺨이 어마 뜨거라 할 정도로 확확 달아오르는 안면홍조증에까지 시달리고 있으니 아아 사랑을 꿈꾸는 이십대 처녀의 삶치고는 어찌 가혹하지 않다 하겠냐마는, 그래도 어디 이해할 구석이라도 있어야 이해를 하든가 도와주든가 할 것 아니냐 말이다. 이건 뭐 길에서라도 우연히 마주칠까 먼저 설레발치며 피해다녀야 할 지경이니 원….

그러나 그 누구도 영화 속 그 누구도 양미숙을 동정하지 않는다. 애써 예쁘게 봐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양미숙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면 한없이 이상하고, 이런 사람이 옆에 있다면 괜히 한두 발짝 정도 물러서있고 싶어질 정도건만 ‘양미숙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래뵈도 우리 영화 주인공이고, 나름대로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두둔하는 이는 절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양미숙 스스로가 자신을 감싸고 나서는 지경이다. 건강을 위해 좌욕기를 사용하고 피부에 좋다는 닭발을 뜯어가며 자기자신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같은 사람일수록 더욱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라는 양미숙의 당찬(그러나 서글프기 짝이 없는) 확신에 찬 선언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외로운 처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은 그런 이유다. 스스로를 동정하는 것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도 전부 내면에 존재한 자신에게서 이끌어내려고 한다는 점, 또 그런 캐릭터로 형상화하고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아마 [미쓰 홍당무]의 가장 큰 장점이며 여타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과 차별화되는 양미숙만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분명 변화해야 하고, 또 바뀌어져야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걸 다들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양미숙은 꿋꿋하게 자신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고수하고 영화의 흐름 역시 그녀의 삶에 억지로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한번씩, 그 나이 또래의 여성들이라면 누구든지 갖고 있을 법한 성적 환상과 열등감과 연애에 대한 기대감을 아주 조금씩 나누어 양미숙과 이유리로 하여금 적절한 시기에 그것을 드러내게 하는 정도이다. 그런 소소한 장치들은 관객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하면서도 시끌벅적한 웃음 끝에 양미숙과(그리고 이유리와) 관객 자신의 내면이 한 자락씩 겹쳐지게 만든다. 당돌하다면 당돌한 일이다. 주인공은 여전히 두 뺨을 빨갛게 물들인 채 자기 할말을 다 하고 다니는데 오히려 관객들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다니.

그러나 여기서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이 드러난다. 철저히 양미숙에게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면 이 영화는 코미디의 경계를 넘어서버리는 사회부조리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감독은 양미숙을 일반적인 상식과 기준의 잣대에 맞추게끔 억지로 변화시키는 대신 친구 종희를 붙여준다. 물론 그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사건사고가 뒤따르기는 했지만 찐따와 찐따애인인 둘은 계란과 밀가루 범벅이 되어서도 나란히 손을 맞잡고 웃으며 교문을 나선다. 그렇다고 그 둘이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느냐? 천만에, 오히려 보란듯이 새 사랑을 찾아 전국 각지의 피부과를 찾아다니기에 이른다. 달라진 점이라면 양미숙의 곁에는 종희가 있고, 양미숙은 호감을 고백하기 위해 뱅뱅 에둘러 윽박지르는 대신 살짝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사회적 통념에서 살짝 비껴서 있는 주인공을 소위 말하는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대신 그녀의 삶은 그것대로 온전히 존중해주는 것, 누구나 품고 있는 저마다의 삶의 방식, 무엇 하나 이것이다, 라고 명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그 수많은 다양성 중의 한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그러면서도 적절한 선에서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세상과 타협할 줄을 안다. 아직 젊은 양미숙에게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희망과 의지를 불어넣어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관객들의 웃음이 그녀를 응원하는 오롯한 순수로 남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양미숙과 서종희가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라는 이 영화의 타협점에 동의하고 또 공감한다. 지금까지 홀로 치열하게 살아온 양미숙에게 그 정도 아량도 봐줄 여유가 없다면야, 우리는 대체 무엇을 보고 웃을 수 있겠는가.


2008. 11. 9.



2008/11/09 11:26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0
다크 나이트(Dark Knight)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2008)
주연: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 (브루스 웨인/배트맨Bruce Wayne/Batman)
       히스 레저Heath Ledger (조커The Joker)
       아론 애크하트Aaron Eckhart (하비 덴트/투페이스Harvey Dent/Two-Face)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 (알프레드Alfred)
       매기 질랜할Maggie Gyllenhaal (레이첼 도스Rachel Dawes)
       게리 올드먼Gary Oldman (고든Gordon)
       모건 프리먼Morgan Freeman (루시어스 폭스Lucius Fox)
       킬리안 머피Cillian Murphy (허수아비Scarecrow)
       에릭 로버츠Eric Roberts (살바토레 마로니Salvatore Maroni)


- 행인이야! 자, 무대 끝에서 끝까지 지나가는 거야.
- 행인?
- 그래. 싫어?
- 아뇨, 그럴 리가요…. 하지만 어떤 인물인지…?
- 어떤 인물?
- 어떤 인물이냐고? 행인이야! 행인!
- 예…하지만 노인인지, 젊은인지, 어린애인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귀족인지, 상인인지, 거기에 따라 삶의 방식도 상당히 다를 텐데….

미우치 스즈에,『유리가면』애장판 2권, 대원씨아이, 429~430쪽, 마야와 연극부장의 대화 중에서


[다크 나이트]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순간 『유리가면』의 저 장면을 떠올렸다. 대체 두 작품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생각이 그쪽으로 옮겨갔냐고? 다름아닌 조커를 연기한 히스 레저 때문이다.

아마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조커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배우에게 제시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안내일 뿐, 결국 ‘조커’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하느냐는 철저히 배우의 몫이다. 그런데 조커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름도 나이도 지문도 DNA도 치아기록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딘가에서 자랐을 터인데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설명할 단서도 없다. 그렇다고 조커 자신의 언행에 진정성이 묻어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의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서 그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진짜’라는 느낌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단지 인간의 육체 안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한계도 느껴지지 않는 원초적인 악, 그리고 그 악과 마주했을 때 저절로 배어나오는 본능적인 공포감이다. 굳이 조커라는 캐릭터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로 묘사하는 것과 그 존재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다크 나이트]의 가장 큰 난제이자 가장 큰 성과는 바로 히스 레저가 연기한 조커의 형상화에 있다. 강직하고 신념에 차 있던 하비 덴트를 광기와 분노가 입을 벌리고 있는 막다른 곳으로 몰아가고, 소박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선량한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던(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극한의 이기심을 이끌어내고, 고담시 전체를(그리고 하려고만 했다면 아마 전세계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는 조커. 타인의 공포를 자양분삼아 더 큰 악을 낳게 하지만 정작 조커는 두 시간 반 동안 한번도 그 자신의 분노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아주 조금씩, 상대방을 자극할 정도만 흘려보낼 뿐이다. 이러한 조커이기에 사실 배트맨도 투페이스 하비 덴트도 그의 적수는 되지 못 한다. 세 명의 캐릭터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혹은 서로 물고 물리는 사슬처럼 엮여 있지만 사실 조커는 철저히 그들의 우위에 자리하고 있다. 차라리 조커가 다른 여느 악당들처럼 돈이나 권력이 목적이었다면 그걸 막으면 된다. 유치장 안에 갇힌 조커를 정말 죽을 정도로 두들겨 패서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조커는 배트맨의 마음 속 그늘을 간파하여 자극하고 하비 덴트 안에 숨겨진 투철한 정의감의 반대, 한쪽 면이 검게 그을은 동전의 양면성을 발견하고 이끌어낸다. 한때 고담시를 범죄의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정의의 사도로 여겨졌던 백기사 하비 덴트의 어둠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흑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길로 배트맨을 인도하는 것은 바로 조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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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배트맨과 대치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하비 덴트가 될 수밖에 없다. 젊고 청렴하며 법과 원칙 이외에는 다른 어떤 잣대도 들이대지 않는 그에게서 브루스 웨인은 더 이상 배트맨의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엿본다. 솔직히 그가 아무리 밤의 고담시를 휘젓고 다닌다 한들 악당은 좀처럼 줄어들 줄 모르고 그가 악당들을 제압하는 방식 역시 악당들의 방식과 별 다를 바 없는 강압적인 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배트맨에 환호하던 시민들도 차츰차츰 고담시의 좀처럼 걷히지 않는 어둠을 배트맨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원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트맨은 사람이 아닌가? 그도 인간이고, 지치고, 사랑하는 여인의 품에서 쉬고픈 바람을 가진 한 남자일 뿐이다. 슬슬 지쳐갈 즈음에 그의 앞에 하비 덴트가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젊고, 활기차고, 실력도 있고 강단도 있고 무엇보다 선(善)과 정의를 추구한다. 더 이상 무거운 박쥐수트를 걸치고 밤거리를 헤매지 않아도 고담시는 평화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담시를 지켜줄 마지막 희망으로 생각했던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배트맨은 자신의 인생이 여전히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비 덴트가 레이첼의 죽음 앞에서 절규하며 거침없이 세상을 향한 증오와 원망을 뿜어내는데 반해 똑같이 사랑하는 이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루스 웨인은 하비 덴트에 비하면 훨씬 조용히 슬픔을 속으로 삼킬 뿐이다. 적어도 배트맨의 가면을 썼을 때라면 악당들 앞에서 버럭질이라도 할 수 있지만 배트맨의 가면을 벗은 브루스 웨인은 그 누구와도 자신의 고민을 나눌 수 없다. 결국 브루스 웨인이 감당했을(혹은 감당하고 싶었을) 인간적인 감정의 대부분을 하비 덴트가 이어받는데 이 과정이 꽤 재미있다. 철두철미한 신념을 바탕으로 합법적인 권위를 휘두르며 누구에게도 부끄러울 일이 없는 정의감을 내세우고,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순수하게 구애한다. 어쩌면 배트맨이 바랐을 그 모든 것을 하비 덴트가 누리고 있는 것이다. 고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투페이스의 죄업까지 모두 자신이 품고 가겠다고 하는 배트맨의 대사는 언뜻 보면 참으로 담담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겁기만 한 의무와 선(善)을 위한 정의를 잠시나마 타인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오롯이 혼자 짊어질 수밖에 없음을 곱씹게 되는 쓰디쓴 독백이다.

[다크 나이트]는 조커라는 이름의 악(惡)이 조종하는 거대한 장기판 위에서 놀아나는 인간군상들과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려다 결국 스스로의 광기에 잡아먹힌 한 인간의 절망, 또 자진해서 짊어진 무거운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결국 더한 무게로 남을 뿐이란 것을 깨달은 또 다른 인간의 고독이 짙게 깔린 세계다. 과연 세상의 그 누가 조커와 맞닥뜨렸을 때 투페이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고든의 아들처럼 배트맨의 정의를 거리낌없이 지지하고 응원하며 그를 감쌀 수 있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겠는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다크 나이트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배트맨을 보며 결국 마지막 승리의 미소를 조커가 짓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인가? 정녕 하비 덴트가, 고든이 바라던 정당한 정의는 실현될 길이 없는 것일까? [다크 나이트]는 이 모든 것에 대한 의문을 던져놓고서도 결국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마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그리는 고담시가 바로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이 히스 레저의 조커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이상으로 나를 우울하고 슬프게 만든다.


꼬리 1> 많은 이들이 팀 버튼과 잭 니콜슨이 만들어 낸 조커와 크리스토퍼 놀란과 히스 레저가 만들어 낸 조커를 비교할 법 하지만 사실 그 둘은 캐릭터명만 같다 뿐이지 별개의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일단 팀 버튼의 고담시, 그리고 조커가 그만의 색채를 더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그려진 반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고담시와 조커는 철저히 현실의 부조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잭 니콜슨의 조커와 히스 레저의 조커는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 [배트맨]의 조커가 팀 버튼이 창조한 기괴하고 몽환적인 고담시에서, 말 그대로 히어로물에서 배트맨과 대립하는 완벽한 악역 캐릭터로 그 역할을 다 했다면,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부패와 타락이 일상화된, 세계 어느 나라에나 하나 둘씩은 있을 법한 어떤 도시―그 도시 이름이 ‘고담’이라고 미리 정해져 있기에 그 이름을 썼다 뿐이지 사실 어느 이름을 갖다 붙였어도 전혀 상관이 없었을―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구현화한 정점에 자리한다. 잭 니콜슨의 조커가 악역 캐릭터로서의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했다면 히스 레저의 조커는 ‘이것이다’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무형의 존재로 그려진다. 그 어느 쪽이든 참으로 인상적인,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조커다.
꼬리 2> 그런데 레이첼을 연기한 매기 질랜할…아무리 봐도 캐리 피셔랑 정말 닮았던데;;;
꼬리 3> 고든 씨,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정말로 가족을 위한다면 빨리 짐 싸서 가족이랑 같이 고담시를 떠나요. 안 그러면 당신 진짜 과로사하든지 길바닥에서 갱들한테 총 맞아 죽든지 둘 중의 하나야. ㅠ_ㅠ


2008. 8. 11.



다크 나이트,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2008/08/11 23:05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4
섹스 앤 더 시티(2008)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마이클 패트릭 킹Michael Patrick King(2008)
주연: 사라 제시카 파커Sarah Jessica Parker (캐리 브래드쇼Carrie Bradshaw)
        킴 캐트럴Kim Cattrall (사만다 존스Samantha Jones)
        크리스틴 데이비스Kristin Davis (샬롯 요크Charlotte York)
        신시아 닉슨Cynthia Nixon (미란다 홉스Miranda Hobbes)
        크리스 노스Chris Noth (미스터 빅Mr. Big)
        제니퍼 허드슨Jennifer Hudson (루이즈Louise)
        데이빗 아이젠버그David Eigenberg (스티브 브래디Steve Brady)
        에반 핸들러Evan Handler (해리 골든블랫Harry Goldenblatt)
        제이슨 루이스Jason Lewis (제리 '스미스' 제로드Jerry 'Smith' Jerrod)


몇 시즌의 몇 번째 에피소드였는지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섹스 앤 더 시티(이하 SATC)] 중에서 참 마음에 와 닿는 장면 중 하나가 있다. 브래디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미란다가 캐리 앞에서 브래디에게 젖을 먹이려고 애를 쓰다가 결국 캐리와 제대로 된 이야기는 하나도 나누지 못하는 장면. 미란다는 친구의 얘기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하지만 결국 품에 안고 있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데 더 정신이 팔리고, 캐리는 결국 그냥 돌아와야만 했다. 그 미묘한 단절, 그 미묘한 괴리감. 화면 가득 한 글자씩 타이핑되던 캐리의 단상만큼 한 템포 멈춰 서서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이런 장면들은 [SATC]의 강점이기도 했다.

인기를 끌었던 TV시리즈를 영화화할 때는 이런저런 위험요소가 따르는 법이다. 가장 큰 문제라면 2, 30분 남짓의 시간에 딱 들어맞던 흐름과 구성을 두어 시간 정도로 화악 늘리기 위해서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개연성있게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역시 2, 30분 동안의 짧지만 흡입력있는 기·승·전·결 구조에 익숙해져 있던 기존의 팬들을 고스란히 데려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극중 칼럼니스트인 캐리가 써내려가는 글 몇 줄만으로 장면을 전환하고 단편적인 깨달음을 전달하기에 140여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 때문인지 극장판 [섹스 앤 더 시티]는 몇 가지의 사건을 준비한다. 일단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맡고 있는 캐리와 빅의 결혼을 중심으로 미란다와 샬롯, 사만다의 상황이 한데 어우러진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만큼, 인기를 끌었던 TV 미니시리즈를 영화화한 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도, 그리고 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도 그만큼 좀 더 깊어지고 성숙한 모습이기를 기대했다. 과연 그 결과는?

드레스가 이쁘기는 이뻤다마는...-_-a;


내가 이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이미 결혼한 이들은 그 나름대로, 싱글로 남아있는 이들은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변함없이 만나 수다를 떨고 우정을 나누는 그런 소소한 모습들이었다.1) 만약 여전히 TV시리즈였다면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는 게 가능했을 테지만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소화해내야만 하는 극장판에서는 결국 굵직굵직한 사건들로 이야기를 끌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지만 나름대로 재치가 넘치던 에피소드를 원하던 내 기대, 내 취향에는 극장판이라는 형식은 처음부터 그다지 맞지 않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만큼의 인간적인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던 걸까? 특히 숱한 연인들을 거쳐 (아마도) 마지막 사랑인 빅과의 만남을 몇 년간 이어오면서도 TV시리즈와 별반 나아지지 않은 헛똑똑이 캐리의 모습은 참으로 실망스럽다. 여전한 모습, 발전이 없다. 연애와 사랑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찰과 경험을 해왔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결혼 문제에 있어서는 한참을 돌아온 후에야 결론에 이른다. 물론 결혼이라는 현실에 있어서 이때까지 보고 들은 간접경험은 별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갖가지 경험과 실수, 그로 인한 소소하지만 진솔한 깨달음을 전달하기 위한 역할을 작품 속 화자인 캐리가 떠맡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30대의 캐리와 지금의 캐리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것, 또한 TV시리즈에서 빅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때와 극장판에서의 빅과의 관계가 나아진 바가 거의 없다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늘 냉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며 캐리의 현명한 조언자로 남아있던 미란다 역시 일보 후퇴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일과 가정을 동시에 꾸려가야 하는 40대 여성의 노곤한 일상을 보여주려 한 시도였다면 어느 정도 공감은 할 수 있지만(그런 면에서 나는 스티브를 용서하지 못하는 미란다의 마음 역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빅에게 던진 말 한 마디를 두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캐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미란다라니, 예전의 그녀였다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물론 샬롯의 말대로 고백해야 할 시기를 기다릴 필요는 있었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언젠가는 한번 부딪쳐야만 하는 그 상황을 애써 피해 도망다닌 걸로밖에 안 보인다. 이 역시 TV시리즈였다면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을 텐데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해 일부러 질질 끌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샬롯의 경우는 그냥 제자리걸음 상태. 나름대로 좌충우돌을 겪었던 세 명과 달리 샬롯은 한층 안정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임신을 하게 된 샬롯은 4총사 중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이미 입양을 통해 딸아이를 얻은 상황에서 또 다시 임신을 한다는 데 대해 캐리나 미란다, 사만다가 겪는 일련의 사건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함은 아닐까 싶어 다소 마뜩찮은 감도 없지 않았다(샬롯이 그동안 괴로워한 걸 생각하면 축하해야 마땅하지만 뭐랄까 영화 전체의 균형을 위해 임신이라는 장치를 이용했다는 느낌마저-_-).

그나마 내적 외적으로 가장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는 바로 사만다이다. 연인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며 때로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접어두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가장 힘들 때 함께 그 시기를 견뎌내 준 스미스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까지 느끼게 되지만, 결국 스미스를 향한 사랑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역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별을 고한다. 물론 TV시리즈에서 사만다는 이미 리처드에게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더 사랑한다며 헤어진 적이 있지만 극장판에서의 스미스와의 이별은 또 다르다. 마음에 드는 반지를 꼭 자기 돈으로 사고 싶었다고 말하는 사만다의 모습2)은 이전처럼 상대방을 자신에게 묶어두기 위해 사랑이라는 감정에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사만다‘다운’ 성숙함을 보여준다. 4총사 중 가장 나이가 많고 또 가장 먼저 50대에 진입했다는 점에서 사만다의 성장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50이라는 나이에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열정, 여전히 자기애에 충실하지만 예전에 비해 타인을 한결 배려하는 모습. 아마 4총사 중 유일하게 결혼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믿고 세상을 헤쳐 나간다는 면에서 사만다는 비혼(非婚)여성들의 롤 모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R], [엑스파일], [CSI], [프렌즈] 등 많은 인기를 얻었던 여타 드라마들과 비교했을 때 [SATC]는 짧다면 짧은 6시즌으로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캐리, 미란다, 샬롯, 사만다―네 명의 여성들이 꾸려왔고 또 앞으로 꾸려갈 삶과 사랑과 인생과 우정에 대해서 네 명 각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또한 팬들 역시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화려한 의상, 값비싼 웨딩드레스가 이미 끝을 내버린 이야기의 답습을 무마시켜 주지는 못 한다. 짧은 시간 속, 스쳐지나가는 단상을 하나 둘 씩 잡아두며 삶과 사랑에 대해 작지만 의미있는 의문을 던져주던 [SATC]의 매력이 영화 속에서는 온갖 의상과 구두의 형형색색에 파묻혀버린 아쉬움이 너무도 크다. 비록 영화 [SATC]는 한 발 더 나아가보려다가 두 발 물러서버리긴 했지만  때로는 아아 조금만 더, 하는 순간에서 스스로를 다잡으며 멈출 줄 아는 것이 나이가 들었기에 가능한 성숙한 모습 중 하나가 아닐까.


1) 왜냐하면, 이제 결혼을 한 입장에서 나 역시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드라마를 통해서나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 빅이 캐리를 위해 대형 옷장/신발장을 리모델링하는 장면과 나란히 놓고 보면 참 뭐랄까, 입맛이 쓰기도 했다. 4총사 중에서도 유독 캐리를 안 좋아해서 그렇기도 하지만-_-


2008. 6. 18.



2008/06/18 10:33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2
이퀄리브리엄(2002)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커트 위머Kurt Wimmer(2002)
주연: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 (존 프레스턴John Preston)
         에밀리 왓슨Emily Watson (메리 오브라이언Mary O'Brien)
         숀 빈Sean Bean (패트리지Partridge)
         테이 딕스Taye Diggs (브랜트Brandt)
         앵거스 맥페이든Angus MacFadyen (듀퐁Dupont)
         숀 퍼트위Sean Pertwee (영도자Father)
         윌리엄 피트너William Fichtner (유르겐Jurgen)




그 어드메의 왕님과 닮아보인다면 단지 기분 탓;


독재국가의 존재, 다수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기 위한 공포정치, 그를 행하기 위해 무작위로 휘둘러지는 무력(武力). [이퀄리브리엄]의 배경은 지금까지 디스토피아를 다룬 많은 영화들에서 등장했고 또 그만큼 익숙해진 설정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이퀄리브리엄]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너무나 명확하고(즉 진부하고), 그 방식 또한 너무나 노골적이다. ‘평형상태equilibrium’라는 제목부터 확실하지 않은가. 인위적으로 한쪽을 눌러죽이면 언젠가는 그 반작용으로 다른 한쪽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법. 인간의 감정을 억제시킨 제국 리브리아는 그로 인해 결국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무엇 하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교과서적인 이야기 진행(=재미없는-_-)과 결말임에도 주인공 존 프레스턴을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 덕분에 영화 속 프레스턴이 겪었던 전율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는 있다.

감정유발자들을 발각하여 처단하는 특수요원인 클레릭 중에서도 최정예 요원으로 손꼽히는 존 프레스턴. 그의 아내는 일찍이 감정유발자로 소각처분을 받았으나 그의 아들은 클레릭 예비교육을 받고 있는, 자나깨나 감정유발자들을 색출하는 데 전념하는 리브리아의 모범적인 시민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내와의 감정 교류도 전혀 나누지 못하는 리브리아의 1급 클레릭인 프레스턴. 그러나 자신의 옷을 개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보일 듯 말 듯한 표정의 변화를 보이고 아내 역시 그런 남편을 지그시 바라본다. 순간 들이닥친 부대원들이 프레스턴의 아내를 포박하려 하자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요원들을 제압하는 그. 그것이 과연, 자신의 가족을 해하려는 자들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였을까, 아니면 아내를 ‘사랑’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반사적인 행동일까. 그 어느 쪽이든 간에 아내가 감정유발자로 소각된 기억마저 프레스턴에게는 자신이 지금까지 적발하고 처단한 여타 감정유발자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제껏 그 어떤 감정의 노출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이기에, 매일같이 일어나는 자연현상마저 그에게는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금까지 그저 무심히 바라보던 침실 창가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아침햇살이 새삼스레 눈을 찔러대고, 유리창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의 마음을 세차게 두드린다. 인위적으로 누르고 외면해오던 일상의 감동이 둑이 터지고 봇물처럼 몰아치는 그 순간, 프레스턴은 아무 말도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침이면 해가 찬란히 떠오르고 밤이 되면 창백한 달이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천체의 움직임은 이제껏 모든 감정을 억압해왔던 프레스턴을 순식간에 압도해버린다. 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금단의 과실을 한 조각 깨문 것마냥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줄달음치는 전율을 ‘느껴버린’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 어떤 장식도 없이 목언저리까지 꽉 채우는, 직선으로 떨어지는 클레릭의 옷차림은 금욕적인 신부의 사제복과 다름없지만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존 프레스턴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한다. 특히 프로지움으로 감정이 억제되어 있을 때와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하지 않을 때, 혹은 억제하고 있는 것처럼 애쓸 때, 영화의 막바지 하얀 제복을 입고 마지막 결전에 임할 때의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 톤이 다 다르다. 모든 감정을 통제하고 억제하는 리브리아의 모범적인 클레릭이던 그가 자신을 꽁꽁 묶어놓고 있던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련의 과정들이 어느 한 부분 급하게 치우치거나 혹은 늘어지는 일 없이, 그러나 딱 적당한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정점을 향해 간다. 앞으로도 많은 영화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줄 테지만, [이퀄리브리엄]에서 크리스찬 베일은 배우로서 그 자신이 가진 힘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차할 경우에는 영화 전체를 감당할 내공까지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바꿔 말하면, 이 영화는 대본이나 연출의 힘에 기대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연배우의 연기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거다. 그만큼 [이퀄리브리엄]의 구조는 허약함에도 그 안을 채우는 배우들의 연기는 참으로 알차다. 글쎄, 크리스찬 베일이나 에밀리 왓슨, 숀 빈 같은 배우들의 호연에 만족하라면 그러마 하겠지만 아무리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을 데려다놓았다 하더라도 순전히 그들 덕분에 영화의 시작과 중간과 끝이 겨우겨우 그 맥을 유지한다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그저 배우들만으로 만족하고 넘어가기엔, 영화의 작은 그릇 안에서 넘쳐나는 그들의 재능이 아깝고 또 아까울 뿐. 이런 영화들이 더더욱 많아진다면, [이퀄리브리엄] 못지 않은 우울한 세상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2008. 3. 7.



크리스찬 베일

2008/03/07 00:29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3
왕의 남자(2005)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이준익(2005)
주연: 감우성(장생)
        정진영(연산)
        장녹수(강성연)
        공길(이준기)
        처선(장항선)
        육감(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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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爾]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왕의 남자]. 참으로 알기 쉬운 제목이지만 왜 [이爾]라는 원작 제목을 두고서 굳이 [왕의 남자]라는, 다소 원색적인 제목을 택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극의 공길은 왕의 것도, 장생의 것도 아닌 공길 자신이었지만 영화의 공길은 그렇지 않다. 이름만 같다 뿐이지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즉, 영화의 공길은 왕의 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그런데 사실 이 ‘왕’이라는 것도 좀 묘한 것이, 영화의 연산은 한번도 왕인 적이 없다. 눈앞의 신하들은 자나깨나 ‘선왕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라며 가르치려 드는데다 연산 자신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애정과, 사랑하던 여인을 잔인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부왕에 대한 증오, 그리고 왕의 아들인 덕에 절로 왕이 된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스스로 제 발을 묶어버린 어린애다. 후궁인 녹수도 연산의 연인, 혹은 죽고 없는 그의 어미 노릇을 하며 감싸는 역할이지 연산을 왕으로 받들지는 않는다. 그는 왕이었으되 왕으로 인정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산이 왕이라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하는 인물은 그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리는 천하디 천한 광대 공길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공길은, ‘이爾(너)’가 아니라 ‘왕의 남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극의 중심에 있는 공길의 성격이 완전히 바뀜에 따라 그를 둘러싼 연산과 장생의 성격 역시 대폭 바뀔 수밖에 없다. 원작에서 그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권력과 세상을 비웃던 자유를 추구하던 장생과, 억지웃음을 지으며 몸과 마음을 내맡기면서까지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 했던 공길이 대등한 입장인 가운데 갈등이 빚어졌다면, [왕의 남자]의 공길은 장생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장생 역시 그런 공길을 아낌없이 보살핀다. 공길에게 있어 장생은 놀이판에서든 어디서든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든든한 짝이자 형이며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며 장생에게 있어서도 공길은 안주하지 못하고 평생을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삶 속에서 유일하게 정붙이고 마음을 주는,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존재이다. 굳이 입밖에 내어 감정을 전달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관계. 피를 나눈 가족보다 긴밀하고, 육체로 이어진 것 그 이상으로 마음과 마음이 몇 겹씩 한데 엮인 관계. 이 두 사람 사이에 연산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2005년도 [이]의 연산을 보면서 상당히 얄팍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영화의 연산은 말 그대로 ‘애’다. 제대로 된 성장기를 겪지 못하고 그저 숨죽이며 공포에 질린 채 하루하루를 견뎌내다가 어느새 왕위에 오른 아이. 이제야 가슴을 펴고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선왕의 유지와 공신들이며 비명에 죽어간 어머니가 남긴 그림자는 계속 연산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다. 그는 사랑을 알기 전에 공포를 맛보았고, 그로 인해 증오를 품고 복수의 칼을 쥐게 된 사람이다. 비록 녹수 앞에서 마음 편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같이 놀’ 동무가 필요했다. 겹겹의 장지문 너머, 주안상을 발치 멀찍이 치워두고 함께 방바닥에 엎드려 그림자놀이를 하며 웃고 놀 수 있는 동무가. 성숙한 어른이 될 기회를 아예 잡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린 연산은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공길을 앞에 두고 영문도 모른 채 어미를 잃고 아비 앞에서 떨어야만 했던 그 옛날의 어린 연산으로 되돌아간다. 녹수는 연산에게 쾌락과 애정을 주었지만 연산은 또 다른 것을 필요로 했다. 자신의 슬픔을 가공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다시 온전히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공길이었다. 연산의 눈물을 못 보았더라면 공길은 미련없이 장생과 궁을 떠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건만, 그는 지금까지 꾸역꾸역 목 안으로 울음을 눌러 넣을 수밖에 없었던 왕의 슬픔을 느끼게 된다.

출연비중으로 보면 연극보다 영화의 장생이 훨씬 무게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극의 표면적인 흐름을 공길이, 내면적인 흐름을 장생이 이끌어간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왕의 남자]에서 장생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다고만은 할 수 없다. 오히려 영화 [왕의 남자]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연산이다. 모든 것을 가졌으면서도 온전히 자신만의 것은 갖고 있지 못한 슬픈 왕. 장생은 오히려 연산이 극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추임새를 넣는 역할에 가깝다. 그렇기에 ‘어느 잡놈이 그놈의 마음을 훔쳐가는 것도 모른 채’ 연산과 공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그 비중이 줄어 아쉬운 점이 적잖았던 공길과는 달리 녹수의 경우 영화이기에 가능한 장점 덕분에 더욱 돋보였던 것 같다. 무대에서와는 달리 영화는 배우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스크린 가득히 치마폭을 파고드는 연산을 앞에 두고 ‘미친놈’이라고 뇌까리는 강성연의 연기는 영화 전체를 통틀어 두고두고 기억날 명장면 중 하나다. 그때의 그 미묘한 표정, 목을 울리며 살짝 떨리던 그 목소리는 녹수의 연산에 대한 감정을 절절히 표현하는데 전혀 모자람이 없다. 애증, 연민, 연인이되 어머니로서의 역할까지 떠맡아야 했음에도 정작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자신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여인의 자조(自嘲)섞인 그 한 마디 덕분에 영화 속 녹수는 연극의 녹수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연극의 내용이 영화로 옮겨지면서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다소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상영시간이 엇비슷한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영화는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지니고 있던 다채로운 면들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꼭 필요한 부분만 취해 강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닐 것이요 자칫 잘못하면 원작의 장점을 깡그리 없애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시도였지만 영화 [왕의 남자]는 연극과는 사뭇 다른, 그러나 연극 못지않은 흡입력을 발휘한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공길 앞에서 그리도 환하게 웃었던 연산의 웃음, 왕의 슬픔에 동조하는 공길을 바라보던 장생의 서글픈 눈길이 도포자락을 벗어던지며 그간의 한을 토해내던 연극 속 공길만큼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속 연산과 장생과 공길과 녹수가 그들만의 삶을 살다 죽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비록 카메라의 클로즈업에 힘입은 바가 없지 않다 해도.


꼬리1> 영화를 보면서 함형숙의 「파사」의 분위기를 떠올린 건 나뿐이었을까?
꼬리2> 사실 이 글은 쓴 지 2년이 훌쩍 넘은 글인데 써놓고 잊고 있었던 걸 그저께 찾아냈습니다. 으하하하; 이런 거 종종 발견하면 좀 좋을텐데-_-;


2008. 3. 3.



2008/03/03 21:06 | 관련글(트랙백) 2 | 댓글 0
추격자(2008)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 나홍진(2008)
주연 : 김윤석(엄중호)
         하정우(지영민)
         서영희(김미진)
         김유정(은지)
         정인기(이형사)
         박효주(오형사)


한 남자가 있다. 한때 경찰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여자들 등쳐먹으며 사는 악덕 보도방 업주에 불과한 남자, 엄중호.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이 한명 두명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는 잡으면 다리를 분질러놓겠다는 듯 이를 갈며 걸리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고 또 벼르게 된다. 하지만 실은 없어진 여자들이 도망가거나 팔려간 게 아니라 살해당한 것임을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게다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살해당했고 어디에 시체가 유기되었는지도 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살인범은 떡하니 경찰서에 잡혀와 있고 어떻게든 족쳐서 정보를 캐내야만 하는데 영화 속 경찰과 엄중호는 관객들이 알고 있는 정보의 십분의 일도 모르고 엉뚱한 곳만 헤매고 다니는 거다. 그야말로 속에선 천불이 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엄중호와 경찰들이 자꾸 헛다리를 짚고 헛물을 켤 때마다 관객들은 답답해하고, 죽은 줄만 알았던 미진이 꼼지락거리기 시작하면 그 긴장은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아간다. 영화 [추격자]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위해 필히 드리워져야 할(혹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다들 생각했던) 장막은 [추격자]에서 일찌감치 모두 걷어내버린지 오래다. 긴장을 유지하기 위한 몇 장의 카드를 관객들에게 모두 내보이고서도 영화 전체적인 흐름의 주도권은 여전히 감독과 배우들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다는 점에서 [추격자]는 상당히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다. 이미 모든 정보를 까발려놓고 시작하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영화 전체가 물먹은 솜 마냥 축 늘어질 위험이 다분했음에도 영화는 김윤석과 하정우라는 두 배우를 내세워 과감하게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그 시도는 99% 성공했다. 마치 처음부터 살인범이었고 추격자인 양 너무나 자연스럽게 망원동의 그 어느 골목길 안에 서서 서로를 마주하는 두 배우. 복잡다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인물들을 김윤석과 하정우는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특히 추격자 역할의 김윤석은 관객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조금씩조금씩 좁혀가며 별다른 설명 없이도 관객들이 엄중호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미진의 딸 은지가 필요불가결하게 등장하고 사이사이에 약간의 빈틈들이 존재하지만 그런 단점이 이 영화의 장점과 매력을 상쇄시킬 정도는 못 된다.

관객들과의 거리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기 힘들 정도기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살인범인 지영민의 캐릭터는 유난히 접근하기도, 설명하기도 힘들다. 성장과정도 그간의 행적도 분명하지 않고 살인동기도 딱히 이것이다, 라고 정의내리는 것도 쉽지 않다. 당최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의문은 지영민에 대한 막연한 공포로 이어지고, 텅빈 사무실에서 워드를 치고 있는 여형사 앞에서 ‘비린내가 난다’며 이죽거리는 장면에서는 생리적인 혐오감 역시 극에 달한다.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 역시 발견하게 되는데 지영민의 경우 그가 어떤 경위로 그런 인물이 되었는가에 대한 정보는 일체 제공되지 않는다. 지영민을 연기하는 하정우 역시 때로는 순박한 바보처럼, 때로는 닳고 닳은 사기꾼처럼, 때로는 격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혈기넘치는 젊은 남자처럼 그때그때 연기 톤을 바꾸며 영화 속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결국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끝까지 지영민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게 된다. 바로 이 점이 영화 [추격자]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게 하는 또 다른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범행이 일어나는 장소는 평온해보이는 서울의 어느 주택가, 그것도 방범초소가 바로 코앞에 있는 집이다. 좁다란 골목길, 그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수백개의 조그만 불빛들과 골목길의 전봇대들, 길가에 늘어서있는 자가용들은 영화 속 장면이 아니어도 지금 당장 슬리퍼를 꿰어신고 나가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광경들이다. 익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낯선 범행은 언젠가 나도 저 범행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해결되지 않는 범죄, 잡히지 않는 범인, 속수무책인 경찰, 미친 듯이 실낱같은 단서를 찾아헤매는 피해자의 가족, 친구들. [추격자]는 안정적인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관객들을 장악하고 그들의 공포를 자양분삼아 영화 속 사건들을 현실에 대입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고난 다음에도 어딘가 꽉 막힌 듯한 답답함, 껄쩍지근하게 남아있는 그 무언가는 두고두고 이 영화를 기억하게 만든다. 그것은 과연 온전히 영화 자체의 힘일까, 아니면 언제 어느 때고 나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적어도 그런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만은 [추격자]가 지닌 저력일 것이다.


꼬리>만약 장동건처럼 깎아놓은 듯한 미남배우가 지영민을 연기했더라면? 짐작조차 안 되는구나(깔깔).

2008. 3. 2.



김윤석, 하정우

2008/03/02 20:46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1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임순례(2008)
주연: 문소리(미숙)
        김정은(혜경)
        김지영(정란)
        조은지(수희)
        민지(보람)
        남궁은숙(진주)
        이미도(현자)
        조영진(송감독)
        엄태웅(승필)





포스터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핸드볼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 신경도 안 쓰다가 올림픽만 되면 메달 운운하는 대표적 종목 중 하나인) 여자핸드볼 선수들이 거듭되는 연장전과 승부던지기 끝에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따낸 그 순간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다. 소외된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 앞에서 이를 악물고 일구어낸 승리. 스포츠영화답게 땀과 눈물이 넘치고 끈끈한 동료애도 물씬 묻어난다. 폭소까지는 아니어도 순간 피식, 하고 입가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는 장면들도 있다. 누구나 짐작가능한 갈등과 감동과 약간의 눈물까지. 기대치가 상당히 높았던 탓에 약간 실망한 구석도 없지는 않지만 이만하면 그럭저럭 흡족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있는 영화라고나 할까.

아니, 솔직히 말하자. 과연 흡족한가? 적어도 나는 이 영화가 그저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감동실화’에 집중하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분명 이 영화는 감동적인 실화를 소재삼아 만든 작품이지만 (나 또한 당시 결승전을 보며 얼마나 눈물콧물을 흘렸던가;) 악전고투 끝에 거머쥔 은메달 그 이면에 숨어있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 주인공들은 남성들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감수하고 인내하고 희생해야만 하는 것들을 하나 둘씩 관객들 앞에 풀어놓는다. 사업실패 이후 자포자기하고 모든 책임과 생계를 떠넘겨버리는 남편 때문에 피를 토할 것만 나날을 보내고 있는 미숙. 이혼녀라는 이유 때문에 감독(대행이기는 했지만) 자리에서 떠밀려나야만 했던 혜경. 생리주기 조절 때문에 호르몬제 복용을 하다가 결국 불임이 되어버린 정란. 그들이 ‘핸드볼 선수’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자 핸드볼 선수’였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싸안고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노장 3인방. 지금 그들의 고민 역시 어쩌면 후배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될 지도 모를 일이다. 슬프게도.

텅빈 관객석. 썰렁하기 그지없는 경기장에서 묵묵히 경기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핸드볼’ 선수이기에 그들은 팀이 해체되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수난을 겪는다. 여자라면 누구나 당연히 하는 생리마저도 그들에게는 또 다시 넘어야만 하는 벽이 되어 생리통이 심해도 엔트리에서 제외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미숙의 “직원이면 정사원이겠죠?”라는 물음 뒤에 뒤따라오는 것은 바윗덩이같은 침묵이요, 호르몬제까지 먹어가며 어떻게든 운동하겠다고 이를 악물고 버텨낸 끝에 돌아오는 것은 “내 꼴 나지 마라.”라는 정란의 자조섞인 한탄뿐이다. 남자감독이었어도 이혼 경력이 문제가 되었겠냐는 혜경의 항변은 이제 너무나 흔한 상황, 흔한 대사라 더 이상 언급한다는 것도 멋쩍을 정도다. 문제는 미숙, 정란, 혜경…그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이 비단 여자핸드볼 선수인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일까. 비록 생각했던 것만큼 펑펑 울지도 않았고 기대했던 만큼의 (소위 스펙따끄르한) 가슴벅찬 감동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의 행복한 순간]은 작지만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품고 있다. 소외당한 그들이 척박한 현실과 맞서 싸워가며 그토록 힘겹게 일구어낸 값진 열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딱히 달라질 바는 없을 것만 같은 현실. 그렇지만 영화는 꿋꿋하게 은메달이라는 표면 아래 숨어있는, 소외받는 이들의 상처들을 돌아보고 짚어보고 보듬는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비록 뻔한 갈등구조와 결말이라 해도 그 안에 담겨있는 사연들은 저마다의 진정성을 품고 있기에 더욱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든다. 은메달이 주는 눈물겨운 감동만큼이나 작고 작은 아픔들을 외면하지 않고 되돌아보는 이 영화가 나는 무척이나 고맙고, 또 사랑스럽다.

우리의 왕언니 정란 언니님. 일터에서 이런 언니 한명씩은 있어야 일할 맛도 나는 법.



꼬리1>핸드볼 경기 장면을 소화해내기 위해 촬영 전부터 계속 체력훈련과 연습을 했다고 하던데, 그래서인가 배우들간의 호흡이 너나할 것 없이 참 좋다. 대사를 주고받는 박자도 그렇고, 자연스레 배어나오는 언니 동생들간의 유대관계 또한 그렇고. 그런 분위기는 단지 대본연습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닐테지. 배우들간의 촬영 분위기 또한 참으로 훈훈했을 것 같다.
꼬리2>마지막 결승전 장면만큼, 아니 그 이상 울컥했던 장면이 바로 정란의 ‘내 꼴 나지 마라.’ 장면. 그 순간 숙연해지는 선수들과 착 가라앉는 공기라니. 이건 정말 여성관객들이라면 더더욱 감정이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섣부른 짐작이기는 하지만 만약 감독이 남자였다면 과연 이런 에피소드에 이만큼의 비중을 주었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잠시 해보았다.
꼬리3>그래도 맞선남의 얼굴을 보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할 수가 없어서…;
꼬리4>문소리 연기야 말할 것 없고, 김정은의 연기도 상당히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란 역을 맡은 김지영의 연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배우로서도, 그리고 극중 인물로서도 자기 자리를 제일 확실히 꿰어차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2008. 1. 14.



하정우

2008/01/14 19:40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0
색, 계 (色, 戒: Lust, Caution, 2007)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 이 안(2007)
주연 : 양조위(이)
탕웨이(왕치아즈/막 부인)
조안 첸(이 부인)
왕리홍(광위민)


[색, 계(色, 戒: Lust, Caution)]라는 제목은 간단명료하면서도 영화의 내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제목이다. 이와 왕치아즈는 서로를 유혹하고(혹은 무의식중에 유혹당하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경계한다. 매국노를 처단하겠다는 대학생들의 치기어린 애국심에서 비롯된 계략은 어느새 이와 왕치아즈의 삶을 도저히 풀 수 없는 하나의 실타래로 엮어버리고, 두 사람은 서로간에 얽힌 인연을 애써 끊으려 하지 않고 자진해서 그 그물 안에 몸을 누인다.

영화의 줄거리가 참으로 전형적이라는 사실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젊은 혈기 하나만을 믿고 조국을 위해 이 한몸 바친다는 생각에 취해있는(실제로 바치는 건 치아즈 한 사람 뿐이지만-_-), 여주인공의 치졸한 친구들만큼 영화의 내용은 무척 얄팍하다. 매혹적인 여자스파이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한 남자에게 접근하고 그의 마음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진짜 사랑에 빠지고, 그리고 끝내는 파국을 맞는다는, 어쩌면 그 시대 진짜로 있었을 것도 같은 그런 이야기. 1940년대, 그 암울한 시기가 과연 언제쯤 끝날 것인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던 그때에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리라 기대했던 관객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깨지고, 조국 해방은 요원하고, 치아즈와 그의 친구들은 결국 죽임당하고 홀로 남은 이는 연인의 침대에 앉아 눈물을 삼킨다. 밤낮없이 마작판을 벌이는 이부인과 그녀의 친구들도, 그리고 고문실에서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술술 불어대는 광위민과 그 무리들도, 이 장군과 왕치아즈도 누구 하나 땅 위에 발붙이지 못하고 1942년의 상해 거리 위를 부유(浮游)한다. 치아즈가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과 인생을 걸고 이에게 몸을 던지는지 그 동기(動機)도, 인과관계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리듯 치밀한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개연성은 있을 법도 한데 이 영화는 그런 ‘친절’도 베풀어주지 않는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색色, 그리고 계戒뿐이다.



유혹하는 여자, 그리고 바라보는 남자


치아즈와 이 장군의 첫 정사에서 이는 다짜고짜 치아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어떻게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려는 그녀의 뺨을 후려갈기고 마치 짐승처럼 그녀를 때리고 강간한다. 유혹의 낌새를 알아챈 사냥개의 탐색전이자 그동안 애써 외면해왔었지만 결국 거부할 수 없었던 이끌림을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이 장면이다. 사실 이 장면부터가 상당히 충격적이라 이후 꽤나 길게 이어지는 몇 번의 베드신을 보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참 씁쓸했지만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에야 겨우 그들의 정사가 그토록 ‘적나라하게’ 그려져야만 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두 사람이 ―몸도, 마음도― 솔직해질 수 있는 때라고는 (단 한 장면을 제외하고는) 오직 그 순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그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색(色)도, 계(戒)도 그 경계선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 거침없이 치아즈를 몰아붙이면서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던(혹은, 유지하려 애쓰던) 이의 얼굴이 어느 순간 일그러지면서 옅은 신음을 흘릴 때, 이를 자신의 온몸으로 휘어감으며 치아즈가 남모를 눈물 한 방울을 흘릴 때. 몸과 몸을 맞대는 바로 그 순간만이 그들의 진심이 서로 통하는 때이다.

분명 처음 치아즈는 막 부인을 ‘연기’했었다. 그러나 이의 앞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안절부절한다는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막 부인으로 그의 앞에서 계(戒)를 펼치고 있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의 앞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그녀가 치아즈로서 그의 마음을 건드리려 하는지, 막 부인으로 다가가려 하는지 관객들은 확신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는 막 부인이 아닌 치아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인과 그녀의 친구들 앞에서는 더없이 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정작 음침한 지하감옥에서 그는 늘 누군가를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거침없이 치아즈의 몸을 탐하면서도 과연 그녀의 육체만을 원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그녀의 마음까지 원하는 것인지 명쾌하게 결론내리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치아즈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어느새 달라져 있다.

엄격히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이 아마도 계략의 일부이고 그에 따른 결과라고 해야겠지만 그렇게만은 단정지을 수 없는, 분명 그들 사이에는 교감이 이루어졌다고 확신케 하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의 베드신에서 저도 모르게 드러나는 감정, 감정들이다. 상당히 긴 시간동안 흐르는 정사장면과 노출수위보다도 더욱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단발의 신음, 안타까운 몸짓, 흔들리는 시선, 서로의 품안에서 허물어지며 파르르 떨리는 어깨, 그 모두가.

베드신을 제외하고 두 사람의 마음이 완벽한 접점을 이루는 순간은 바로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앞에 둔 때이다. 늘 의심과 경계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이가 처음으로 커다란 보석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자 치아즈는 남자의 진심이 자신의 진심과 일치하는 것을 깨닫고 그만 흔들리고 만다. 어쩌면 지금까지 층층이 쌓아올린 그 모든 의혹과 가식이 그 때를 위해서였던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다이아몬드의 화려한 광채보다 더욱 깊디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이의 대사와 치아즈의 나직한 중얼거림은 정말 그 찰라같은 순간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만드는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을 산산조각내버린다.

그토록 격렬했던 베드신을 생각하면 김이 빠진다 싶을 정도로 마지막 장면은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결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미래는 없었던 것이고, 서로의 마음을 진실로 알고 확신한 순간은 더없이 짧았으니. 죽은 여자는 말이 없고, 남은 남자는 남몰래 눈물을 삼키는 것도,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도 그저 가슴속에 묻어둔 채 지금까지 그러했듯 또 다른 계戒를 펼치며 살아남아야만 할 것이다. 구겨진 침대 시트 위에 잠시 머물렀던 그의 그림자에 왠지 물기가 흠뻑 묻어있었던 것만 같았던 그 느낌은, 어디까지나 그 장면을 보는 한 관객의 바람이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라는 사람은 그 물기마저도 다시 제 몸 안에 가둔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끊임없이 누군가를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자백을 받아내고, 자신에게 다가서는 모든 이들을 의심하고…. 그 수많은 계(戒) 중에서 치아즈 단 한 사람 앞에서만 자신의 색(色)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음을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것인지, 아니면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그 순간이 덧없을 정도로 짧았다는 것에 안타까워해야 할 것인지 나는 물론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글쎄, 이제 와서 그걸 알아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릇 계戒라는 것은 눈치챈 순간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법이다. 나로서는 그저 그들의 색色과 계戒가 뒤엉키던 때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꼬리1>그래도 첫 정사(그러니까 강간-_-)장면이 어찌나 충격이었는지…정말 그 순간 내 심정은 이랬다. ‘나의 조위 님은 그렇지 않아!! OTL’
꼬리2>

보면서도 누구지, 눈에 참 익은데 누구지, 했는데 조안 첸 언니셨다! 이럴 수가, 내가 조안 첸 언니를 몰라보다니!!(그저 저를 자근자근 밟으시와….) 하지만 내게 있어서 조안 첸의 이미지는 [트윈픽스]의 조시 패커드와 거의 일체화되어 있어서;;
꼬리3>세상에 양조위 이 남자, [화양연화]에서는 뒷모습으로 연기를 하더니 [색, 계]에서는 이 남자 그림자까지 연기를 한다. 이 일을 어쩜 좋으냐! OTL
꼬리4>양조위의 연기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탕웨이의 연기 또한 참으로 놀랍다. 감정을 묶어두어야 하는 때와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는 때를 실로 절묘하게 조절하는 그 모습이라니. 이를 연기하는 양조위와 이안 감독의 연출이 그만큼 안정적으로 받쳐주긴 했겠지만 배우 본인의 노력과 실력이 없었다면 [색, 계]의 치아즈―막 부인이라는 인물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무척이나 기대되는 배우다.
꼬리5>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의 양조위는 유난히 안성기를 닮은 것 같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2007. 11. 16.



양조위

2007/11/17 19:30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4
빨간구두(2004, Non ti muovere: Don't move)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세르지오 카스텔리토Sergio Castellitto (2004)
주연: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 (이딸리아Italia)              
        세르지오 카스텔리토Sergio Castellitto (띠모떼오Timoteo)
        클로디아 게리니Claudia Gerini (엘자Elsa)
        엘레나 페리노Elena Perino (안젤라Angela)
        마르코 지아리니Marco Giallini (만리오Manlio)


영화든, 만화든, 소설(팬픽, 동인을 포함) 등등 모든 시청각매체를 접할 때 다들 나름대로의 호오(好惡)를 가르는 몇 개의 기준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내 경우 그 기준 중 하나는 ‘강간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세우는가 아닌가이다. 아무리 연출이 매끄럽고 연기가 출중하고 그림이 탁월하고 낱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보석이 반짝거려도 ‘강간→사랑’의 도식을 그려내는 작품은 결국은 덮어버리고 만다. 한 사람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시키는 행위가, 어떻게 사랑의 전단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앞으로도 이 생각이 바뀔 가능성은 제로다). 맙소사, 그게 말이 돼?

이딸리아, 엘자, 그리고 안젤라까지. 띠모떼오와 연결된 세 여자는 모두 불행하다. 사랑하지만 같이 있을 수 없는 이딸리아와 영혼이 아닌 껍데기와 살고 있는 엘자, 빛도 보지 못하고 없어져버린 또 다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죄책감에 매번 휘둘려야만 했던 안젤라. 적어도 안젤라는 사춘기 소녀의 불안정한 감정에 힘입어 아버지 띠모떼오에게 대항할 수는 있었지만 이딸리아와 엘자는 그저 속절없이 인내할 수밖에 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귀한 시간들을 그렇게 한 남자로 인해 가슴아파하며 스스로를 희생할 정도로 그녀들이 무에 그리 큰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그녀들의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결혼한 남자가 띠모떼오였다는 것뿐이건만.

영화는 이딸리아와 엘자에게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딸리아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띠모떼오에게 일부 털어놓기는 하지만 그것은 띠모떼오가 이딸리아를 더욱 애틋하게 받아들이는 도구로 이용될 뿐이지 이딸리아라는 독립된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와 사건과 감정의 중심은 띠모떼오이다. 그런데 이 남자, 참 이기적이고 겁쟁이인 것도 모자라 옹졸하기까지 하다. 이딸리아를 강간하고 다시 찾아와서는 술이 취해 그랬다고 변명하는 것까지 참으로 파렴치한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너무나 전형적이어서 치가 떨릴 정도다). 남들의 이목을 두려워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버리려는 용기도 내지 못하면서 이딸리아와의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독히도 이기적이면서 소심하기 그지없는 띠모떼오. 문득 궁금해진다. 과연 그런 것이 사랑일까? 무미건조한 일상 속에서 그저 숨만 쉬고 있다 처음으로 경험한 강렬한 일탈에의 유혹, 금단의 과실을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잊을 수 없는 쾌감…. 그것이 과연 사랑인가? ‘나는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 띠모떼오는 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신을 향해 고해성사를 하지만 그 고백은 이내 바닷물에 씻겨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딸리아를 강간했다는 사실이 속죄받고 용서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띠모떼오는 이딸리아를 진정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두려움, 설렘, 기다림, 절정, 질투, 환희…. 처음 느껴보는 그 잊을 수 없는 감정을 놓치지 않으려 그렇게 무턱대고 자기 자신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딸리아가 그렇게 희생당하다 못해 띠모떼오를 위한, 그리고 안젤라를 위한 마지막 구원의 표상으로 남아있어야만 했던 이유가 조금은 납득이 간다. 처음부터 그런 ‘장치’였으니까. 한 남자가 삶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지난 과오를 반성하며 앞으로의 새 삶을 다짐하기 위해서. 세상에, 그걸 위해서 영화 속 그녀들은 그렇게 울고 괴로워하고 고통받고 그를 대신해서 다치고 피흘리며 죽어가야만 했던 게다!!

안젤라는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나고 띠모떼오는 구원받는다(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로 한가운데 앉아 있던 빨간구두를 신은 여자의 환상은 오로지 띠모떼오 한 사람만의 것이다. 띠모떼오 뿐만 아니라 그의 딸 안젤라의 목숨까지 떠맡아야 했던 가엾은 이딸리아. 조건없는 사랑이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그런 건 일방적인 희생일 뿐이다. 그 희생을 발판삼아 그동안 간직해두었던 이딸리아의 빨간구두 한 짝을 이제야 십자로 위에 놓고 돌아서는 띠모떼오의 순정을 칭찬이라도 해줘야 하나? 그래, 그걸로 띠모떼오가 후련해질 수 있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처음부터 이 영화는 ‘그녀들’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말이다. 브라보, 띠모떼오. 당신은 이제 새 삶을 살 수 있어!(짝짝짝)


꼬리1> 온갖 잘못은 혼자 다 저지르더니 혼자 상상하고 혼자 구원받고 혼자 감격하고 혼자 다짐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그래, 어디 당신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딱 이런 심정이었다.
꼬리2> 잘 만든 영화가 반드시 좋은 영화가 될 수는 없다. 이 영화가 바로 그에 딱 들어맞는 좋은 예다.


2007. 7. 15.



2007/07/15 10:55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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