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어느 날 어느 날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지금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펜대를 손에 쥐고 자근자근 그 끝을 씹어대고 있을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단박에 알 수 있는 그런 날. 토요일 아침 7시 40분. 오히려 저녁 7시 40분이라면 또 모를까, 주5일 근무제를 ‘비교적’ 준수하려고 애쓰는 회사 사무실에서 인기척을 느끼기에는 다소 어중간한 시간이지만 이미 그가 와 있음을 알 수, 아니 확신한다. 소리가 들릴세라 살짝 문을 여닫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그가 앉아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제는 거의 희미해져가는 담배 냄새의 끝자락이 코에 와 닿는 걸 보니 아마 지금쯤 다시 담배 한대를 물고, 한손으로는 왼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오른손으로는 책상 위 어딘가에 팽개쳐뒀을 라이터를 찾아 더듬더듬하고 있을 것이다. 파티션 두 개 너머로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든다. 빙고. 흠칫 놀란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는 대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만다. “미안. 흡연실까지 나가기가 귀찮아서.” 그 자신은 무척 담배를 즐기면서도 비흡연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엔 절대 담배를 꺼내지 않는지라 텅빈 사무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이 못내 겸연쩍은가 보다.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안경을 벗어들고 양쪽 눈을 비빈다. 검은색 셔츠의 구깃한 옷주름 사이사이마다 피곤이 겹겹이 배어나오는 것만 같다. 파티션 너머로 들여다 본 그의 책상 위에는 엊그제 두어 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도로 원점으로 돌아간 기획서와 시안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남들보다 두어 시간을 일찍 나와서 열심히 고쳐본들 결국 윗선의 누군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라치면 바로 너덜너덜 난도질되어 되돌려질 터인데. “어차피 수정은 월요일 오후는 되어야 가능하잖겠어? 토요일 아침부터 이럴 건 없잖아.” 어제도 제일 마지막으로 카드 긋고 나갔으면서. 보나마나 아침에 사약같은 블랙커피 한 사발만 겨우 들이키고 나왔을 거면서. 요 몇 주 동안 계속 옳게 휴일 챙겨 쉬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당신 때문에 나 역시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쉬어본 기억이 까마득한데. 계속 툭툭 튀어나오는 말, 말, 말들을 억지로 삼킨다. 제대로 깎지 않은 수염 때문에 한층 더 까슬해보이는 얄따란 뺨이 그저 안쓰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손끝만 빤히 바라볼 뿐이다. 남들 눈에 뜨일까봐 제대로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만원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짝 둥글게 깎은 손톱 끝만 슬쩍 스쳐 보냈던. “그래도 오늘 좀 일찍 나와서 고생하면,” 굵은 마디마디 긴 손가락들이 천천히 내 손목을 감싸 쥐고, “내일은, 널 볼 수 있으니까.” 맥박이 뛰는 바로 그곳에 그가 입술을 가져다댄다. 피로와 건조한 날씨 때문에 부르트다 못해 군데군데 핏자국이 말라붙은 입술로 그는 그동안의 사죄를 몰아서 청한다. 메마른 피부 위로 열꽃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날이 있다. 이런 그의 사죄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되돌려주어야만 하는 그런 날이. 대충 어림잡아도 석달만의 만남을 가지게 되는 날의 전일이라면 더더욱. 여린 입술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그 입에 담았던 미안함을 고스란히 넘겨받는다. 만약 금요일이었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TGIF를 외칠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토요일 아침, 8시를 향해가는 시각. 그래도 좋다. 오늘이 지나면 마음껏 당신을 안아볼 수 있으니까. 마음껏 그 지친 어깨를 다독여줄 수가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슬몃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그 어느 날의 아침. FIN. 2008/02/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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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떤 대화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단편] 어떤 대화 “하지 마.” 에어콘을 켜려고 베드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왜? 덥잖아.” “그냥 둬. 이게 좋아.” 들어도 못 들은 척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그는 땀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리는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쿡, 하고 그녀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자 그 울림이 고스란히 뺨을 타고 전해져왔다. 불과 20여분 전만 해도 막 샤워를 끝내고 몸에 걸친 실크슬립이 스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하니 은은한 향내를 풍기고 있던 그녀의 몸은 질펀한 정사 끝의 끈적한 땀과 타액과 체액에 젖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몸을 더 좋아했다. 이게, 진짜 당신이니까. 오직 이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당신. 한 손에 들어찰 정도로 알맞게 부푼 가슴부터 탄탄한 아랫배까지 입술로 천천히 훑어내리며 체취의 진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달려들 듯이 다가오는 강렬한 탑노트는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의 땀냄새와 체액 냄새. 미들노트는 각종 허브향이 어우러진 샤워젤 냄새. 그리고 베이스노트는 ―비록 숨이 멎을 정도로 깊숙이 들이마셔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여리디 여린 찻잎의 은근한 향이었다. 하얀 대리석 욕조에 찻잎 물이 들든 말든 간에 뜨거운 물에 그 비싼 찻잎을 아낌없이 흩뿌리고는 몇십 분이고 찰방거리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이 그녀의 호사스런 취미였던 까닭이다. 위스키 원액을 단숨에 털어넣은 것처럼 목안이 화악 타올랐다. 견딜 수 없는 갈증에 그는 지금까지 내려왔던 흔적을 성급히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크림색 갓을 씌운 조그만 미등 하나만이 켜져 있는 어슴푸레한 방안에서도 가늘게 뻗은 쇄골이며 둥긋한 가슴이 빚어내는 굴곡은 그녀의 몸에 꼭 그만큼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번씩 몸을 뒤챌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림자의 자취를 좇아 그는 정신없이 입술을 눌러대었다. 늘 이런 식이다. 나른한 여운이나 감미로운 후희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기엔 그의 눈은 너무도 원색적이어서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키스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릴 뿐. 붙잡아 두겠다거나 함께 있고 싶다거나 하는 말은 단 한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그가 유일하게 그녀에게 집착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원래대로라면 이것도 반칙이지만. 보일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의 짧은 더벅머리를 갈퀴손으로 빗어 내렸다. 한참을 가슴팍에 뺨을 부비고 있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내일 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이건만 이럴 때의 그의 얼굴은 열 몇 살 먹었음직한, 한창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소년의 그것이다. 그러나 표정과는 딴판으로 곧게 뻗은 척추에서 꼬리뼈를 지나 탄력있는 둔부 쪽으로 거침없이 내려가는 와중에도 몸 속 스위치를 잘도 하나씩 눌러 켜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뜨거운 두 손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괴리감은 이내 짜릿한 전기신호로 돌변해 손끝 발끝으로 치닫는다.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삼키며 다리를 그러모았다. 만약 다른 여자 앞에서 이런 얼굴을 하고 이런 손으로 그 여자 몸을 만지면, 할퀴어버릴 테야. 위험, 위험. 하마터면 입밖에 내어 말할 뻔 했다. 순간 마음을 다잡느라 손끝발끝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잘 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돼. 스스로 대견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온몸의 긴장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또 그렇게 웃네. 쵸코(蝶子)가 그렇게 웃어?”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비틀면서 웃어. 이렇게.” ‘마음속 어딘가가 비틀린 인물’이라던 사사키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냈었던가 하는 마음에 그녀는 조금 언짢아졌다. 그렇잖아도 오늘 촬영분에서 그녀가 파악한 것과 사사키가 의도했던 것이 딱 들어맞지 않아 결국 오늘 찍었어야 할 장면을 다음으로 미루고 온 것이다. 느긋하게 늘어져있던 온몸이 다시 딱딱하게 굳으며 움츠러들었다. “왜 그래?” “아, 오늘 결국 통과 못한 장면이 있었거든.” “뭔데?” 침대 옆 의자에 슬립과 배스로브가 걸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의자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방 한 구석에 놓아둔 가방 쪽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 하얀 나신이 움직이는 모습이 꼭 하늘대는 꽃잎이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저 나른한 뒷모습에 섞인 짜증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그는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그녀를 담아보았다. “여기, 이 부분. ‘유리같은 눈을 하고 터덜터덜 걸어온다.’” “유리같은 눈?” “응, 유리. 『개선문』의 첫 부분에서 따온 거라는데.” 1) “『개선문』? 레마르크의 소설을 말하는 건가?” “응. 읽어봤어?” “아니.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이젠 기억도 안 나.” “이 부분 해석이 안 맞았던 건가?” “보통 유리같은, 이라고 하면 텅 비고 공허한 느낌이지. 책에서도 그런 뜻으로 쓰인 거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쵸코는 그게 아닌걸. 유리같다는 게, 외부의 것이 그대로 비쳐보이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뒤집어보면 내면의 것도 그대로 다 보여진다는 거잖아. 투명하니까.”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쵸코야?” “쵸코는 그저 텅 빈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속에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어서 주체를 못 하는 거지. 난 도저히 그렇게밖엔 이해 못 하겠어.” “사사키는 뭐래?” “내가 너무 많이 드러낸대. 자의식 과잉이라고. 쵸코는 오직 쵸코 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연기하는 쵸코는 그렇지 않다고. 원래 처음부터 비워져있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쵸코는 억지로 비워낸 캐릭터라나.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어긋나는 것 같아.” 사사키의 의견에 100% 동조할 수는 없지만 75%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이 때로는 배역을 압도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그만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만 하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늘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단점 아닌 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요령도 일찌감치 몸에 익혔고 또 그렇게 잘 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작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의 해석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그녀라 해도 늘 옳은 해석만 내릴 것이라는 확신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뭐라고 충고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시나리오는 제대로 읽어보질 못한 터라 그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일은 어쩔 거야?” “일단 가서 다시 얘기해봐야지. 내가 생각하는 쵸코랑, 사사키 상이 생각하는 쵸코랑 어디서부터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지. 내가 헛짚은 거면 몰라도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맞춰봐야 하니까.” 사실 처음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몸을 섞는 동안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인 도피가 아닌 감정의 유기(遺棄). 그와 함께 있으면 바로 그게 가능했다. 엉킨 실로 꽁꽁 묶여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 가위질 몇 번에 툭툭 흔적도 없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한없이 날선 감정 때문에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날이면 그녀는 그의 등에 있는 힘껏 손톱을 세웠고 그는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대신 하얀 속살에 이를 박으며 키득거리곤 했다. 아직도 붉게 부풀어있는 손톱자국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탄탄한 근육 위에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무늬처럼 선연히 남아있는 몇 겹의 붉은 상흔을 입술로 적셔나가자 그의 넓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 미묘한 떨림에도 자잘한 등 근육들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오른쪽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마지막 상처자락에까지 키스로 세례를 내려준 후 그의 곁에 길게 몸을 뉘었다.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기억나? 예전에, 당신이 피를 뒤집어쓴 채 절규하는 장면 찍은 적 있잖아.” “기억하지 그럼. 그게 왜?” “그때, 같이 있던 스태프고 동료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당신 안고 싶었어. 그 볼썽사나웠던 흰색 블라우스랑 시퍼런 스커트 따위 죄다 찢어버리고, 그냥 그 옥상바닥에서 같이 뒹굴고 싶었어.” “저기, 그때 당신 아마 등에 칼 맞고 널브러져 있어서 날 안으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았던가? 물론 대본상 얘기지만―.” 대답 대신 낭창한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숨쉬기가 힘겨울 정도로 세게 옥죄어왔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정말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소년같은 눈동자에 딱 그 나이대의 남자애들이 품을 법한 욕정이 일렁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곧 마흔 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만약 다음에 그런 기회가 생기면, 해도 돼?” 으르렁대는 듯한 낮은 목소리. 합일의 순간에 내뱉는 짧은 신음이 맞물린 그 말에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이 남자, 이제 목소리만으로도 그녀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고 있었다. “응? 해도 돼?” 대답 대신 그녀는 그의 허리에 자신의 길고 늘씬한 다리를 감았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먼저 당신 덮쳐줄게. 피흘리며 죽어가든 말든 상관없이.” 예의 그 개구진 미소를 떠올리며 그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솜털까지 곤두선 귓불을 살짝 깨물며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땐, 마지막 속옷 하나까지 다 찢어줄게.” “약속…한 거야….” 단발의 옅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상체를 뒤틀었다. 쉼없이 몰아치는 자극에 그나마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성 한 조각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그가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은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FIN. 2007. 11. 24. ========================================================================================= 1) 라비크는 여인의 눈이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유리처럼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E.M. 레마르크, 『개선문』, 흥신문화사, 11쪽. 2) 음…이 글에서의 ‘그’와 ‘그녀’는 이미지 모델이 있습니다. 익히 짐작하신 분도 계시겠지만요. ^^;; 어쩐지 그 두 사람이라면 이런 대화를 나눌 법도 하다는 느낌에 끄적여 보았습니다. 제게 있어 그 두 사람은 연인이라 하기엔 더 위험한 치정관계로 얽혀 있다는 느낌이어서 말입죠(쿨럭). 3) 원래 이렇게 대놓고 공개하려고 끄적인 글이 아닌데; 요즘 이래저래 팍팍해서 그렇습니다. -_-; 2007/11/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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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2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more.. 겨우겨우 힘겹게 눈을 떴다. 눅눅하게 내려앉은 공기 때문인지 온몸이 무겁다. 창틀에서 타닥타닥 빗방울이 돋는 소리가 들렸다. 엊저녁에 잠시 그쳤던 장맛비가 다시 내리는 모양이다. 침대 밖으로 한 발을 내딛자마자 순간 아찔하는 바람에 다음 발을 헛딛고 주저앉고 말았다. 왜 이렇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밥을 먹은 지 50시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진한 블랙커피 네다섯 잔, 아마드의 레몬&라임 티백을 우려낸 홍차 역시 네다섯 잔, 냉장고에 남아있던 버드와이저 캔맥주 네 개, 그리고 텅 빈 채 나뒹굴고 있는 1리터짜리 생수병 두 통…. 뭔가 씹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건 알고는 있지만 몸에서 받아주지 않으니 별 도리가 없다. 다시 입맛이 당길 때까지는 이대로 있는 수밖에. 우유 한 컵을 세 번에 나누어 마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문제집은 문제집대로 한데 모아두고, 따로 출력한 자료는 자료대로 A4 파일 케이스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각종 참고서며 연구자료도 일단 차례대로 벽에 기대 쌓아두고 특활반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프랑스 혁명자료도 따로 클립으로 묶어 4호 규격 행정봉투 안에 넣어두었다. 혹시 모를 오류나 오탈자가 있을까 싶어 출력해놓은 기말고사 문제를 들추어보았다. 첫 번째는 파란색 펜으로, 두 번째엔 빨간색, 마지막으로 노란 형광펜으로 체크, 체크, 체크. 이상없음을 다시 확인하고 시험지는 갈기갈기 찢어 휴지통으로, 시험문제 파일을 저장한 USB는 가방으로. 이것저것 메모해놓은 이면지와 읽다가 팽개쳐둔, 어림잡아 족히 열흘 치는 될 듯한 조간신문 더미는 한데 모아 거실 쪽으로 밀어놓았다. 얼기설기 쌓여있는 택배상자 안에 들어있는 책들을 끄집어내고 완충용 비닐팩은 볼펜 끝으로 찔러 공기를 빼낸 후 다시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바닥에 널린 것들을 대충이나마 쌓아두고 고개를 들자 눈에 들어온 것은 빨래건조대에서 걷긴 걷었지만 제때 옷장 서랍에 넣어두지 않아 빨아야 할 옷들과 죄다 섞여버린 티셔츠며 속옷, 양말들, 제자리에 있지 않고 그저 되는대로 쌓여있는 책상 위의 온갖 잡동사니들. 30분 동안 정말 계속 치우기만 했는데도 별반 달라진 기색이 없는 방안이었다. …꼭, 나 같구나. 기껏 치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정리는 전혀 되지 않는. 그래도 한숨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시 몸을 움직였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다시 이중 삼중으로 겹쳐 꽂아 바닥에 쌓아둔 이런저런 책들을 빽빽하게 끼워 넣었다. 아마 두어 달 후엔 지금보다 더 늘어나 있을 책 때문에 몽땅 뽑아내어 이런저런 방법으로 겹치고 겹쳐서 다시 꽂아두어야 할 테지만 일단 이 상태로 당분간이나마 견딜 수 있을 터였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은 애써 빤 옷 빨아야 할 옷 가릴 것 없이 몽땅 세탁기 안으로. 이제 어떤 기준이나 규칙없이 그저 빈 공간 내지는 쌓아둘 수 있는 평면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온갖 물건들에 점령당한 책상을 치워야 할 차례다. 50개 들이 공CD 케이스 여러 통, 그것과는 별개로 나뒹굴고 있는 CD들, 탁상달력, 아이디어 메모용 수첩, 읽다말고 책갈피만 끼워둔 잡지며 책, 손목시계, 어디로 갔는지 한 짝씩 달아나버린 귀고리들, 아까 내놓지 않은 나머지 신문들, 온갖 필기구, DVD…. 자주 손이 가지 않는 물건들은 어디 서랍 속에 넣어둬야 할 텐데. 책꽂이에 여유가 있다면 한켠을 비워 그쪽에 쌓아두기라도 하련만 더 이상은 자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수납공간이라고는 책상에 딸린 세 칸짜리 서랍. 저 서랍들을 비워서 그 안에 다시 정리해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서랍에는 열쇠가 없다. 그냥 있는 대로 차곡차곡 집어넣고 닫아두었을 뿐이다. 그저 닫아두기만 한 지가 4년. 4년 동안 한 번도 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어떤 물건들이 들어있는지는 모조리 다 기억한다.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조심스레 손잡이를 향해 뻗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4년 만에 열어본 서랍은 마치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양 너무나도 부드럽게, 소리없이 스르륵 열렸다. 제일 위쪽 서랍 맨 안쪽에는 그와 함께 보았던 영화며 공연 티켓을 담아둔 상자가 있다. 공연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부터, 영화 티켓은 고등학교 무렵부터. 세숫비누 세 개가 들어가는 빈 상자 4통 안에 빼곡히 들어찬 티켓들. 10년은 족히 지난 티켓들은 이미 노랗게 색이 바래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첫 번째 서랍은 가득 차버린다. 두 번째 서랍 제일 밑바닥에는 들어있는 하늘색 대봉투 안에는 그가 준 편지들이 들어있다. 둘이 함께 보았던 영화 이야기, 연극 이야기, 책 이야기, 사춘기 시절의 치졸한 감성을 주체할 길 없어 외견상으로만 그럴 듯하게 꾸민 흔적들에 간결하게, 담백하게 답해주었던 쪽지며 편지들. 군대에 있을 때 보내준 편지들. 제대한 후에도 두 달에 한 번씩은 꼭 써서 전해주었던 편지들. 조곤조곤 진지했던 그의 성격만큼이나 글씨도 더없이 단정하다. 꼭꼭 눌러쓴 편지지 뒷면에 새겨진 미세한 요철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편지 내용보다도 정작 손끝에 와 닿는 그 느낌이 좋아서, 마음까지 함께 눌러쓴 듯한 그 느낌이 너무도 좋아서 하냥 쓸어보기만 했던 적도 있었다. 봉투 위 자그마한 포켓앨범에는 그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꽂혀 있다. 처음으로 같이 찍은 사진은 큰오빠의 중학교 졸업식. 마치 친동생인 것처럼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매달리는 나를 보고 어이없이 웃던 큰오빠와 내 어깨를 살갑게 감싸 안아주던 그가 찍혀있다. 그토록 오래 함께 했었건만 사진 50여장을 꽂을 수 있는 포켓 앨범 하나를 간신히 채우는 것은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그 덕분이다. 서운한 적도 없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와서 생각하니 참으로 다행이라면 다행스러운 일. 제일 크고 바닥이 깊은 세 번째 서랍에는 그가 선물해주었던 책이며 CD며 테이프가 가득이다. 장르도 종류도 딱히 정해지지 않은, 기준이라 하면 오직 ‘그가 좋아했던 것’들. 그리고 그 언젠가부터 ‘나도 좋아하게 된’ 것들. 누군가가 나더러 ‘어떤 곡을 좋아해요.’ 내지는 ‘어떤 작가를 좋아해요.’라고 묻는다면 이 세 번째 서랍을 열어 보여주면 되리라. 과연 그와 나를 모르는 그 누군가 앞에서 이 서랍을 열어 보일 수 있다면 말이지만. 1년 이상 열어보지 않았으면 앞으로도 영영 열어볼 일은 없다며 작은 오빠는 늘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정리해버리라고 몰아붙였고 큰오빠는 자기가 먼저 비워버리겠다며 다짜고짜 쓰레기봉투를 들고 방안에 버티고 서긴 했지만 두 사람은 결국 손을 대지 못했다. 나와는 또 다른 의미로 친구 이상 형제와도 같은 느낌으로 함께 했던 그들이니만큼 이 서랍은 오빠들에게 있어서도 쉬이 손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랍 속 편지들은 정말 꽁꽁 숨겨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짓궂은 오빠들 손에 한 번씩은 까발려졌었고, 사진들의 절반은 오빠들과 함께 찍었던 것들이고, 테이프며 책들은 몰래 내 서랍에서 한두 개씩 꺼내가서는 줄창 보고 듣다가 내 성화에 못 이겨 도로 갖다놓은 것들이므로. 나를 알고, 그를 알고, 우리 둘과 가장 가까웠던 그들에게 있어서도 이 서랍은 늘 마음속에서도 열리지 못한 채 남아있었을 게다. 이런 식으로 그를 잡아놓은 것도 나, 이제 조금씩 놓아야 하는 것도 나. ―그렇게 변해갈 나를, 그 사람을 조금씩 잊어갈 나를, 내가, 용납할 수가 없어요. 우습다. 그 사람 앞에서는 그리도 당연한 듯 자신있게 내뱉었으면서, 이 순간 세 칸짜리 서랍을 모두 열어둔 채 망설이고 있다. 아니, 지금 막 열었다 뿐이지 사실은 매일 저 서랍을 보면서 망설였더랬다. 언제까지 담아두기만 해야 할까. 언젠가는 비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될까. 이렇게 그의 흔적들을 없애도 될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들을 두서없이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아버려도 되는 걸까. 그렇게 나 자신을 내버려도 되는 걸까. 정말 모든 걸 없애버리면 과연 어떻게 될까. 20년 가까이 내 마음을 채워왔던 것을 몽땅 비워버리면, 그때의 나는 대체. “인수 오빠. 그래도 돼?” 만 하루 만에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대답해줄 사람도, 물음에 대한 답도 없는 질문을 뱉어내고는 혼자 쓰게 웃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방안이 마치 동굴 속이라도 되는 것처럼 살짝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후 그의 이름을 말해본 것도 처음이다. 내친 김에 더 불러보았다. 인수 오빠, 인수 오빠, 인수 오빠. 생각보다 쉬웠다. 내 입으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나 쉬워서 순간 웃음마저 나왔다. “인수 오빠. 방이 너무 복잡하다. 정리하려면 어디든 물건들을 넣어버려야 하는데 넣을 데가 없어.” 며칠 동안, 그는 내 손을 한참 매만지며 자기 손과 맞대어 손가락 길이를 재보기도 하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기도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냥, 손이 생각보다 많이 작아서. 여자 손은 다 이런가봐?’라며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그러다 바로 그날, 내 손에 끼워준 반지 하나. 그리 예쁜 디자인은 아니지만, 라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심스레 건넨 백금 반지. 그와 관계된 것들 중 가장 잊기 쉬우면서도 가장 잊기 어려운 것. 그 반지를 끼고서 행복에 겨워했던 건 채 3시간도 안 되었지만 그때 내 귀맡에 속삭이던 그 말은―너무나 흔하디흔한 그 한 마디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가장 특별한 한 마디가 되었으니까. 그러나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반지는 내 손에 없었고 오빠들 중 누군가가 챙겨뒀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애써 반지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그런지 빛은 무뎌졌지만 동그란 링에 박힌 아쿠아마린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살며시 왼손 약지에 밀어 넣자 반지는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인 양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때 그가 내 손에 끼워주던 반지는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꼭 들어 맞았더랬는데 지금은 살짝 헐거웠다. 그래, 그때처럼은 아니겠지. 이젠 모든 게 달라졌으니까. 살며시 입술에 반지를 가져다대자 차가운 금속 특유의 냉기가 입술을 타고 목줄기를 지나 가슴 언저리로 내려앉았다. “인수 오빠. 이건 어떡할까? 반지는 워낙 작아서 그렇게 공간도 안 차지하는데. …일단 벌여놓은 것부터 치우고 봐야겠다. 그치?” 헐렁한 반지를 끼고서 다시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남은 티켓 상자를 다 집어넣고 나니 마치 꼭 맞춘 듯 두 번째 상자도 가득 찼다. 꽤 묵직한 상자 두개를 문간으로 밀어 놓는 게 의외로 버거웠다. 텅텅 빈 서랍에 온갖 잡동사니를 쓸어 담았다. 자주 쓰는 필기구며 수첩,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는 제일 위쪽 서랍에. 자질구레한 인쇄물이며 자료들은 차곡차곡 포개어 클립으로 묶어서는 두 번째 서랍에. CD며 DVD 같이 모양새가 큰 것들은 바로 보고 꺼낼 수 있도록 제일 마지막 서랍에 차례대로 넣어두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막 일어났을 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온몸이 노곤했지만 내친 김에 죄다 해치워버려야 할 것 같았다. 청소기의 흡입구까지 바꿔가며 책장 모서리 사이사이까지 죄다 쓸어내고 큰오빠가 차를 닦을 때만 쓰는 극세사 걸레를 적셔서는 문지방 틈새부터 책상 위 스탠드 전선 이음새까지 꼼꼼하게 닦아냈다. 숨이 차올라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려니 더 이상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변덕스런 장맛비가 금세 또 그친 모양이다. 귀한 햇살을 놓칠세라, 환기도 시킬 겸 베란다 창문도 내 방 창문도 활짝 열어젖혔다. 그래봤자 똑같이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겠지만 모처럼 마음먹고 청소까지 깔끔하게 끝냈으니 그 정도야 뭐 어떠랴. 눅눅한 바람이라도 이마에 배어나온 땀을 식히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책장 모서리에 등을 대고 길게 기대앉자 발끝에 테이프로 꽁꽁 발라놓은 상자 두 개가 닿았다. 4년 동안 끌어안고 있었던 그의 흔적들이, 나의 지난 20여 년의 시간이 채 30분도 안 되는 동안에 달랑 저 상자 두 개로 정리되어버렸다.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죄다 꺼내어 상자에 담고, 빈 서랍에는 다시 새로운 것들을 넣어 채우고 상자는 봉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그렇게 치면 마음도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마음에 남아있던 그를 조금씩 지우고, 다른 이를 조금씩 담으면 되는 거다. 그래, 바로 이 서랍처럼. 엊저녁 느닷없던 그 사람의 고백처럼. ―손만이라면 당장이라도 놓을 수 있어요. 하지만 마음은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할 겁니다. 그래도 상관없으시다면. 고백. 마음속에 숨긴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연인 사이라면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는 등의 그런 말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오랜 시간동안 그도, 나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서로를 보아왔고 언젠가부터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민 손에 기다렸다는 듯 깍지를 끼었고 이때다, 라고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저도 모르게 상대방의 입술을 맛보고서는 새로이 눈뜬 감각에 두근거렸더랬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듯 그저 서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갈증을 풀 수 있었던, 굳이 말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 안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그 충만함과 절대 흔들리지 않을 안정감. 그것만으로도 완벽하다고 생각했기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영정 앞에서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가 없었다. 무작정 슬픔을 쏟아내기엔 아직 못한 말이 너무도 많았다.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에게 다짜고짜 작별인사를 건넬 수 있단 말인가. 영어 공부 봐주었던 거 고마워, 함께 영화보러 가주었던 거 고마워, 보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 달려와줘서 고마워, 괜히 토라진 척 하고 있어도 순순히 투정 다 받아주고 감싸주어서 고마워, 내 손을 잡아줘서 고마워, 날 안아줘서 고마워, 결혼하자고 말해주어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렇게나 가슴속에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는데, 단 한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바보같이 그냥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그날 이후 꿈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울며 토해내듯 때늦은 고백을 하게 될 것을 알았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그래, 실은 그 사람의 고백에 순간 가슴이 떨렸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릿함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천천히 손가락에 헐겁기만 한 반지를 매만졌다. 한때는 손에 꼭 맞았지만 이젠 더 이상 맞지 않는 반지. 절대 잊지 않을 거라고 곱씹고 또 곱씹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나. 서랍을 열었다. 반지를 넣어둘 만한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안쪽을 향해 반지를 넣고 탁 닫아버렸다. 챙 하고 서랍 바닥에 반지가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끼니를 제때 때우지 않아 그런지 잠을 자도 피로가 영 풀리지 않아 눈이 뻑뻑했다. 안경을 벗고 눈을 깜박거리자 때맞춰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 방울방울 맺히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래. 오늘은 마음놓고 그냥 울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그냥 울어버리자. 엉엉 소리를 낼 필요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눈물은 쉬지도 않고 나왔다. 이틀 동안 마신 것들이 이젠 죄다 눈물로 나오려나 보다. “사랑해….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계속 생각나…. 근데, 오빠…나 있지….” 말해도 될까. 그래도 될까. 꿈속에서라도 나올까봐 몇 번이고 입을 틀어막고 삼켰던 말.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찢어지듯 비명을 질러댔지만 누가 강요한 적도 없지만 스스로를 묶어두고 가둬 두었던 금기는 너무도 쉽게 깨어져버린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마지막 버팀목이 삭을 대로 삭아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그예 눈을 감았다. 우스운 일이다. 꼭 해야 했던 그 한마디는 결국 하지 못한 채 입밖에 낸 것이 스스로에게 주는 면죄부라니. “아직도 오빠 사랑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도 자꾸 생각나…. 그냥, 자꾸, 자꾸, 생각나….” 그 말만은, 도저히 그 고백만큼은. 몇 번이고 입술을 짓씹으며 그것만은 안 된다고 다짐했건만 속절없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여전히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나왔다. 그래, 계속 울어야지. 눈물로 내 마음을 다 씻어내 버릴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며칠이고 울 수밖에. 이젠 받아줄 이 없는 사랑도, 미안함도, 죄책감도, 어느 틈엔가 그 사람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조금씩 스며 나오는 설렘과 두근거림도, 그렇게 죄다 깨끗하게 씻어내고는 그저 껍데기인 나만 남게 될 지라도. 오늘 하루로 안 된다면 내일도, 모레도 계속 울면 된다. 그날 이후 이미 한번 죽은 마음이니. 모두 비워내고, 다시 추스르자. 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진짜 따뜻한 사람과 마음을 주고받기에도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 시간들. 텅 비어버린 나 때문에 그 사람까지 다치게 할 수는 없다. 들어줄 이 없는 고백은 나 혼자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니까. 묵직한 상자들을 끌어당겨서는 천천히 그 위에 엎드렸다. 투두둑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종이상자 뚜껑에 점점이 짙은 얼룩이 하나 둘씩 번져갔다. 가뜩이나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종이가 푹 젖을 때까지 울고 또 울며 나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그리고…보고 싶어….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도 모르는 새 방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꽉 잠긴 목에서는 더 이상 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눈물만은 샘솟듯 계속 흘러나왔다. 2007/04/27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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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1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고백 1 고백 1 마치 전화가 올 거란 걸 미리 알고나 있었던 듯 담담한 목소리였다. 기껏 마음 굳게 먹고 기합넣어 전화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사무적으로 전화를 받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피시식 김이 확 빠지는 듯한 준혁이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본론을 꺼내기 위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어정쩡하게 안부 챙겨 묻는답시고 이 얘기 저 얘기 돌려봤자 윤이 좋아하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서 윤 씨 집 근처 놀이터에 와 있거든요, 지금.” 하지만, 어떻게 해야. 윤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그렇게나 오랫동안 쌓아올린 ‘그것’은 순식간에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 쨍한 햇살에 봄눈 녹듯 흔적없이 사라질 수도 없음을 준혁 자신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감히 손댈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걸. 흔히들 추억이라 말하는―언제 들추어보아도 웃음 가득해야 할 기억들이 어느새 날을 한껏 세우고 눈물에 흠뻑 젖은 채 마음을 저미고 파고들어 더 이상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갈래갈래 헤어질 때까지 내버려 둘 거라는 걸. 그럼에도 행여 날아갈 세라, 행여 녹을 세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다잡을 그녀라는 걸. 아니, 이준혁. 이제 솔직해지자. 더 이상 뒤를 돌아보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싫다고.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제 내 마음속에 담아두기 시작한 이상 없는 이를 향해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녀는 보고 싶지 않다고. 곁에 앉아 있어도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매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손이라도 한번 꼭 쥐어보지만, 잡히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휙 한번 털어버리는 것만으로 쉬이 내 손을 떨쳐내 버리는 그녀를 이제는 영원히 붙잡고 싶다고. 결코 짧다고는 할 수 없는 1년 반이라는 시간 덕분에 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이어오던 소중한 끈이 단숨에 툭 끊어질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얼굴 한번 볼 기회마저 영영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준혁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어떤 결과가 되든지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만 했다. 자박자박자박자박자박―. 점점 가까워오는 발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의 고리를 끊고 준혁은 몸을 돌렸다. 놀이터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가로등이 흩뿌리는 빛 아래 윤이 서 있었다. 순간 눈이 부셨던 것은 희부옇게 번지는 가로등 불빛 때문인지 그녀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헐렁한 흰색 티셔츠 아래 낡은 청바지를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잠시 준혁을 바라보던 윤이 보일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바지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살짝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티셔츠의 반팔 소맷자락 아래 드러난 하얀 팔이 유난히 가늘어보였다.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피곤한 듯 눈자위를 매만지던 윤이 다시 그를 건너다보았다. 담담한 표정. 예의상 띄우는 의례적인 미소와는 애당초 거리가 먼 그녀였다. 웃고 싶을 때 웃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한다. 그런 당신이니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말을 받아치고는 휘적휘적 돌아서 가버릴 수 있을 테지.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준혁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말해야 한다. 메아리처럼 그저 되돌아올 허탈한 울림만으로 그친다 해도 이 이상은 내가 견딜 수 없으니까. 아주 조금의 흔들림조차도 허용하려 들지 않는 당신 앞에서 이렇게 마구 흔들리는 내 자신을. “무슨 일 있으세요?” 말해야 한다. 몇 번이라도. 그녀 마음에 닿을 수 있을 때까지. “보고 싶어서요. 여기까지 왔는데,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더라고요. 보고 싶어서.” 지금 이 순간의, 아니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가장 솔직한 심정. 보고 싶고, 보고 싶고, 계속 보고 싶어서. 어설픈 꾸밈 따위는 통하지 않을 사람이니, 그저 있는 그대로 전할 수밖에.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지만 ‘보고 싶어서’라는 말끝에 감춘 미세한 떨림을 눈치 못 챌 그녀는 아니었다. 꼭 다문 입술 끝이 더욱 굳게 맞물려 자그만 턱에 오목한 그늘을 만들고 굵은 갈색 뿔테안경 뒤 미간 사이로 살짝 주름이 패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윤은 다시 제 표정을 되찾으려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이준혁 씨, 당신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죠. 이건 반칙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준혁은 그녀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었다. 처음이었다. 서 윤이 바로 자기 눈앞에 있는 이준혁을 곧게 응시하는 것은. “죄송해요. 방금 한 말,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때,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죠, 그렇죠?” 준혁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지 않은 채 윤은 천천히 몸을 돌려 준혁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별다른 표정 변화 한번 보이지 않았던, 늘 차분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다물어진 입술 끝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언제부터일지 모를 익숙함과 편안함 끝에 묻어나는 싸아한 느낌. 준혁을 만나고 돌아온 밤이면 가슴은 한결 따뜻해졌지만 곧이어 그 온기를 바로 식혀버리는 머릿속의 경계경보. 주의, 경계, 위험, 위험, 위험!! 경보를 끄는 스위치도 물론 있었지만 애써 그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던 것은 바로 나. 누르지 않은 스스로를 자책했던 것도 나. 너도 별 수 없구나 서 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말로, 행동으로 확인받고는 순간 으쓱해하는 걸 보면. 하지만 이제 끝내야 한다. 날 위해서, 그리고 이 사람을 위해서. “먼저 놓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게도, 그리고 이준혁 씨에게도.” 말했다. 이제 공은 넘어갔다. 받아주든가, 다시 되받아쳐내든가, 아니면 아예 공 자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었다. The End. 깔끔하게 마침표 하나를 찍고 정중하게 인사한 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서로의 존재를 깨끗이 지우고서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너는 그럴 수 있냐, 이준혁? 그럴 리가. 스스로 던진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망설임없이 나온 즉답에 만족한 준혁은 다시 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침착해보이는 표정과는 반대로 빠르게 뛰는 손목의 맥박이 느껴졌다. 놓칠 수는 없다―. 입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윤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되버릴 때까지 방관한 것은 나. 조금씩 무너지는 자신을 내버려둔 것도 나. 그러니 말해야 한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내가 아직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내가 아직 남아 있어요. 어쩌면 영원히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윤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쓴웃음이 어렸다. 끝이 없는 기다림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공동(空洞)을 언제까지 바라볼 수 있을까. 나처럼 되지 말아요.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표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 자신을 잊을 수 있게 해준 데 대한 최대한의 보답. 그러니까 이 이상은 안 돼. 난, 나로 남아 있어야 해요. “처음엔 괜찮을 거예요. 아주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붙잡아두고 싶단 마음뿐이겠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예요. 조금씩 더 원하게 되고, 그 사람을 잊어가는 나를 바라겠죠. 지난 일 따위 모두 잊고 그저 이준혁 씨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있게 되길 바라겠죠. 그게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마, 이준혁 씨가 바라는 대로,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나도…사람이니까. 숨쉬고, 얘기하고, 웃고, 다른 사람 온기에 기대어보고 싶기도 한…사람이니까….” 착 가라앉은 목소리 끝에 이어지는 긴 한숨. 윤의 어깨가 한번 크게 들썩였다. “그렇게 변해갈 나를, 그 사람을 조금씩 잊어갈 나를, 내가, 용납할 수가 없어요. 그건 내가 아니니까. ‘서 윤’이라는 내가 아니게 돼 버리니까.” 내려앉을 듯한 적요.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상대방의 굳은 손을 흘깃 바라본 윤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웃었다. 입밖으로 내지 못한 무언가로 가득 차올라 일렁이던 윤의 눈이 안경 너머로 웃었다. 나직하게 말을 이어가던 윤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며 웃었다. 그가 보아 온 어떤 모습보다도 그녀다운, 그리고 그녀답지 않은 웃음에, 눈길에 견디다 못한 준혁은 잡고 있던 손을 끌어당겨 그대로 여자를 품에 안아버렸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제발.” 여자의 작은 어깨를 싸안고 귀맡에 찰랑거리는 그녀의 짧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남자는 그렇게 계속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남자의 품에 안긴 여자는 애써 그 품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웃기만 했다. 웃어. 웃어야 해. 웃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울어버릴 테니까. 제발 날 건져달라고 엉엉 울며 매달릴 테니까.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다고 이 사람 손을 먼저 잡아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웃어, 서 윤. 제발, 웃어. 점점 잦아드는 준혁의 목소리와 반대로 윤의 소리없는 웃음은 한동안 그칠 줄 몰랐다.
=============================================================================================== 새삼 손도 머리도 얼마나 굳어있는지 이 참에 자-알 알았다. -_-;; (그리고 언제 풀릴지는 깜깜이라는 것도) 2007/04/19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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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마시다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맥주 마시고 싶어요. 훌쩍. ㅠ_ㅜ 별다른 인삿말 없이 무작정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나를 보고서도 녀석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들이닥칠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베란다의 빨래건조대에 걸려 있던 수건 한 장을 던지며 짤막하게 한 마디 던졌을 뿐이었다. “발부터 씻고 와.” 예나 지금이나 깔끔떠는 저 성격은 여전, 아니 해가 가면 갈수록 더해가는 것만 같다. 방은 물론이거니와 거실이며 부엌이며 욕실이며 베란다며 하다못해 현관 신발장 위까지, 대체 이게 30살 넘은 독신남성의 집이라면 과연 믿을 수 있겠냐 말이다. 달라붙은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저 머리빗들 좀 보라지. 딱 한 사람이 쓴 만큼의 밥공기와 국그릇과 접시 서너 개가 얌전히 엎어져 있는 저 식기건조대는 또 어떤가(행주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마 삶는다고 내놓은 모양이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아마 내가 알고 있는 인맥에서 세 다리를 더 건너 넓혀봐도 저 녀석만큼 살림 꾸리는 데 도가 튼 31세의 독신남성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을 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무장갑을 벗삼아 부엌을 제 방처럼 지내온 지 어언 20년이 훌쩍 넘으니 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야 없긴 하겠지만. ―그래서 내가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거지. 환청처럼 그날의 그,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린다.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처럼 너무나 생생한 그 느낌에 흠칫 놀라 들고 있던 수건을 욕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보송하니 햇볕에 잘 마른 수건이었건만. 혀를 차며 허리를 굽히다가 수건을 집으려 내민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 그때도 내 옆에 앉아 있었다. 1차 삼겹살집, 2차 커피숍, 3차 노래방을 거쳐 다시 4차로 온 바였었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그날은 다들 거나하게, 그러나 기분좋게 취해있었고 두 사람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커플링은 단순한 디자인이었는데도 어두운 바 안에서 유난히 반짝거렸었다. 신기한 일이다. 1년도 훨씬 넘은 그날의 기억이 마치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차례차례 떠오르는 것은. 왁자하니 터지곤 하던 조금은 요란스런 웃음소리도. 술에 취해 한층 더 나긋하게 감기던 그 목소리도. 술기운에 늘어져있던 그녀를 마치 포대기에 싸안은 갓난아이 마냥 팔을 둘러 소중히 받치고 있던 녀석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잔잔한 미소도. “따로 안주는 없다. 저녁도 이미 먹었을 시간이고 해서.” “아, 상관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냉장고 구석구석을 뒤져 멸치 쪼가리에 고추장이라도 내놓는 게 녀석이다. 빙고, 오늘의 메뉴는 하이네켄 캔맥주에 치즈케이크 한 조각. 기분이 묘했다.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이 조합도 그녀가 좋아하던 것이다. 세 번에 한 번은 늘 혼자 어딘가에서 치즈케이크를 사와서는 다 식어빠진 감자튀김과 케첩맛 말고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 소시지 야채볶음이 담긴 접시 옆에 나란히 케이크 상자를 열어놓고서 조금씩 떼어 먹곤 하던. 맥주에 무슨 치즈케이크냐는 주변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도 먹었더랬지. 착각일까. 새삼 고개를 드니 오늘따라 집안 여기저기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만 같다. 정말로 착각이다. 정작 본인은 이 집에서 단 하루도 제대로 지내보지 못했으니까. 이 집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녀석과, 그 자신의 의지로 남겨놓은 그녀의 흔적들 뿐이다.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 거 같으니까, 그냥 마셔.” “너야말로 무슨 생각하고 이렇게 차려놓은 거냐?”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벌써 다 마신 캔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실 한 구석의 조그만 탁자 위에 놓여있던 고지서며 봉투들 사이에서 하나를 집어들어 내게 건넸다. 카드사에서 한 달에 한번 꼴로 날아오는 흔한 다이렉트 메일이었다. 받는 이의 주소란에 씌어있는 그 이름만 아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구겨서 휴지통에 버렸을 지극히 평범한. ‘항상 **카드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민정하 고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객님의 **카드 유효기한 만료에 따른 갱신발급 내용을 다음과 같이 알려드립니다…….’ “버리지 마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내 손안에서 한껏 우겨진 종이조각을 잽싸게 채어가서는 꾹꾹 엄지손가락으로 눌러가며 구김을 펴기 시작했다. 종이를 도로 뺏으려 했지만 두 손에 단단히 쥐어진 종이를 빼내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결국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채 마지막 구김 하나까지 꽉 눌러 편 다음 탁자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두는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종이를 펴던 그 손놀림만큼 단호한, 어떤 만류나 염려도 그대로 되튕겨내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야, 이젠 좀―.” “잊으라는 말도 하지 말고.” 애써 피하려고는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흘기듯 노려보는 내 시선을 굳이 받아쳐내지도 않았다. 조금 전 제가 다 마신 캔을 슬쩍 보더니 휘적휘적 부엌으로 가서는 다시 맥주캔 두 개를 꺼내들고 와서는 옆에 와 앉더니만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 치미는 짜증을 못 이긴 채 애꿎은 치즈케이크만 포크로 잘게 부숴버리고 말았다. “집은 미리 구해뒀었으니까, 아마 여기저기 주소 바꾸면서 그렇게 해뒀던 거 같다. 그 일 있고 나서 끊을 거 다 끊고 했다고 생각했는데…깜박하고 잊었던 모양이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잖냐, 너도.” 그날,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모인 사람들의 눈은 다들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보름 후에 다들 주머닛돈 탈탈 털어 성대하게 축하 술판을 벌여보자고 약속했던 우리는 예상보다 보름 일찍,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검은 옷을 입고 모여서 울다가, 그저 넋을 놓고 있다가, 다시 우는 일을 되풀이했다. 결국은 혼절해버린 어머니와 마치 딸처럼 여기던 예비 며느리의 영정사진 앞에서 넋을 놓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만 있던 또 한분의 어머니, 울다 지쳐 이제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이리 와서 앉으라고, 그리고 너도 좀 울어보라고 채근하다시피 하는 친구들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등 뒤로 한 채 녀석은 결국 모든 절차가 끝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녀석의 눈물을 보지 못한 것은 그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남에게 눈물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도 아니건만, 차라리 내 앞에서만이라도 단 한번이나마 울었다면 괜히 마음을 쓰며 이 집을 제 집 드나들듯이 들락거리지도 않았을 터다. 차가운 맥주캔에 송글송글 맺혀있던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내려 녀석의 손등을 적셨다. 닦아내지 않고 그대로 손등 위를 타고 흐르는 그 물방울이 꼭 속에만 품고 있을지도 모를 눈물방울 같았다. 내가 반 캔도 채 마시기 전에 그는 새로 갖고 온 맥주 한 캔을 그새 다 비우고 또 한 캔을 땄다. 아무리 도수가 낮아도 3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캔맥주 세 개는 과하다. “억지로 잊지 않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절로 이렇게 되는 것뿐이다.” 그래, 늘 그랬었지 너희는. 어느 사이엔가 함께 있는 너희 둘을 당연한 듯 바라보게 되었던 것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피식 웃다가도 왠지 모를 아림에 돌아서는 나를 언젠가부터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추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보였지만 결국 무너지지 않았던 그 어깨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것은 바로 나였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로 행복하길 바랐다. 곁에서 그네들이 뿌려주는 따사로운 웃음 한 조각을 나눠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무언의 약속, 지켜야만 할 자리,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 양 깊숙히 덮어두었지만 결국에는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속내, 알고서도 모른 척 덮어둘 수밖에 없었던 마음,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만 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두 사람. 그게 전부다. 맥주캔을 내려놓은 녀석의 왼손이 내 오른손등을 살며시 덮었다. 겹쳐진 손등을 잠시 바라보다 왼손에 들고 있던 캔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자 다시 제 손을 거두었다. 맥주캔에 맺힌 물방울이 내 손등 위로 또륵 흘러내렸다. 녀석이 거실 한 켠에 있던 티슈 상자를 내 앞에 갖다놓았다. 두어 장 티슈를 뽑아 손등을 닦고 캔에 맺힌 방울방울 맺힌 물방울도 닦아냈다. 다시 캔을 집어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방울이 맺히지 않았다. 2006. 9. 3. ================================================================== 어떤 연락은, 그것이 전화이든, 메일이든, 광고 편지든 간에,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때로는 지독할 정도로 잔인하다. 사무실 책상에 우르르 쏟아놓은 온갖 광고물 사이에서 돌아가신 지 반년이 훌쩍 넘은, 내가 부산에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그저 얘기만 전해들었을 뿐인 계장님의 이름이 적힌 카드사 봉투를 발견하고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한동안 내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무언가를 잡고 싶었는데, 시도는 나쁘지 않았건만 결과물은 (언제나 그랬듯이) 늘 얄팍하기만 하다. 젠장, 나도 이런 내가 싫다니까. 아, 속아파. ㅠ_ㅜ 2006/09/0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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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혼자 맥주마시다 갑자기 생각난 잡상.
열기 “아침 안 드세요?” “난 이거면 돼.” 믹서에 토마토를 두 등분으로 잘라 넣으며 그가 살짝 웃었다. 서둘러 차린 아침상이 부끄러워졌다. 혹시나 늦잠을 자버릴까 자기 직전 취사를 눌러놓았던 밥솥에서 막 퍼낸 따끈한 밥. 미리 멸치다시국물을 우려내어 끓인 된장국. 그가 좋아하는 매운 꽈리고추와 함께 볶은 멸치볶음. 그저께 본가의 냉장고에서 슬쩍 갖고 온 갓김치와 이제 맛이 들기 시작한 양념이 담뿍 배인 배추김치. 언젠가 그가 맛있다며 사먹던 삼각김밥이 생각나서 미리 만들어두었던 쇠고기고추장볶음. 국 말고 따뜻한 반찬이 없는 것 같아 급하게 부친,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린 달걀 프라이. 막 포장을 뜯은 도시락용 김 한 봉지. “그래도 아침밥 먹는 버릇 해두는 게 좋대요. 특히 위장 안 좋은 사람은요.” “정하도 똑같은 말을 했었지.”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가 없어. 언니의 입버릇이었다. 점심과 저녁은 쉬이 건너뛰는 일이 있어도 아침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꼭 챙겨먹곤 했다. 과음한 다음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먹히지 않는 밥을 억지로 데운 보리차에 말아 한 숟갈씩 겨우겨우 떠먹으면서도 아침밥 한 그릇은 거르지 않았다. 너도 미리 아침먹는 버릇 들여두는 게 좋아. 찬 시리얼 같은 걸 아침부터 먹으면 위장이 놀랜다구. 눅눅해진 콘플레이크를 숟가락으로 휘젓는 내게 언니가 곧잘 하던 말이었다. “엠티에 가서도 말야. 새벽까지 술 마시다가 지쳐 쓰러지면, 자기도 같이 마시다 새벽에 뻗은 주제에 꼭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했거든. 아무도 아침밥 먹는 사람 없으니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 혼자라도 먹어야겠다면서 밥을 하더라구. 다들 정하가 밥을 하든 말든 술 취한 채 계속 자기 바쁜데, 자다 기척이 느껴져서 보면 혼자 민박집 마루에 걸터앉아 막 지은 밥이랑 안주로 먹다 남은 김치랑 참치랑 같이 밥을 먹고 있거든. 혼자 먹으면 맛없지 않냐고, 같이 먹자고 하면 잠 덜 깬 채 밥 먹으면 체한다면서도 자기 밥 덜어주고…그래서 같이 먹고….” 잦아드는 그의 목소리가 요란스런 믹서기 소리에 묻혔다. 윙―. 몇 초만으로도 토마토는 쉬이 갈린다. 그가 머그잔 두 개에 갈은 토마토를 나누어 붓고 한 잔은 내게 건네주었다. 토마토를 갈아먹는 것도 역시 언니가 하던 것이다. 아침밥을 먹은 후 언니는 토마토를 꼭 한 개씩 갈아먹었다. 그냥 먹으면 잘 안 먹히는데 이렇게 갈아서 먹으면 훨씬 맛있게 잘 먹히거든. 싫다는데도 부러 토마토 두 개를 갈아서 내 손에 한 컵씩 쥐어주곤 했다. 아침밥 안 먹을거면 이거라도 먹어. 늦게 오면 집에서 과일 먹을 새도 없잖아.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야채야. 토마토의 신맛 때문에 인상을 쓰며 종알대고 있으면 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곤 했다. 그가 토마토 주스 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그는 어쩌다가 아침에 토마토를 갈아먹게 되었을까. 언니가 알려주었을까. 언니가 그에게 갈아주었을까. 그렇다면 언제? 물어보면 아마 그는 선선히 대답해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듣는다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서없이 입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질문들을 밥 한 숟갈과 함께 꾹 눌러 삼켰다. 아침밥을 꼭 챙겨먹던 언니는 이제 없고, 그는 아침밥 대신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나는 그의 앞에서 언니가 아침밥을 먹던 것처럼 밥을 먹는다.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있는 밥알을 삼키려고 후루룩 국물을 떠먹었다. 연거푸 두세 숟갈을 떠먹었는데도 목은 점점 꽈악 메어왔다. 그가 내 얼굴을 볼까봐 얼굴을 숙인 채 쉼없이 손을 놀렸다. 고추장볶음 한 젓가락을 밥 한 숟갈 위에 얹고 다시 김을 그 위에 얹었다. 김 위에 자잘하게 뿌려진 잔소금이 까슬하니 입술에 달라붙었다. 입안의 것을 다 씹지도 않고 다시 멸치볶음을 집어들었다. 고추의 매운 향이 코를 찔렀다. 그는 조금씩 토마토 주스를 마셨고 나는 더욱 재게 손을 움직여 밥 한 그릇을 비워냈다. 마지막 밥 한 숟갈을 꼭꼭 씹고 있으려니 그가 보리차 한잔을 내 앞에 갖다 놓았다. 말없이 그가 떠다 준 물을 다 마셨다. 그는 주섬주섬 식탁 위의 빈 그릇을 챙겼고 나는 멍하니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밑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그릇들을 부셔서 차곡차곡 식기건조대 위에 쌓아놓았다. 찬장 서랍에서 빨아놓은 행주를 꺼내 물에 적셔 식탁 위를 훔쳐내고, 키친타올로 다시 식탁 위의 물기를 말끔히 닦아냈다. 흐르는 물에 행주를 다시 헹구어 물기를 꼭 짜내고 손까지 깨끗하게 씻은 다음 물기를 탁탁 털며 그가 돌아섰다. 그의 모습이 순간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부옇게 흐려졌다. 조금은 안쓰럽다는 듯, 조금은 난감하다는 듯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손을 뻗었다. 내밀지 말아요. 기대하게 만들지 말아요. 당신이 아무생각 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 손길 한번에 나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아. 입밖으로 비어져나오는 신음소리를 간신히 삼키며 흐트러지는 숨을 다잡았다. 온몸으로 내뿜는 경고신호를 알아차린 것일까. 얼굴로 다가오던 손이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멀어져갔다. 거실에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다 내미는 손길이 방금 전처럼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티슈를 건네받을 때 둘의 손가락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깐의 온기, 그러나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는. 여기까지가 그와 내가 마주할 수 있는 위치이고 다가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 긴 호흡 한번만으로도 내 숨의 습기에 녹아버리는 티슈 몇 장에 나는 한참동안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것이, 그와 함께 한 최초의 아침식사였다. Fin. 2005. 8. 27. 2005/11/2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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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꽤나 오래전에(아마도 2년 전-_-) 끄적여두었던 낙서.
그냥 지워버리기엔(사실 아트바크 님 홈의 게시판에도 올라가 있지만) 조금, 섭섭한 마음에. 엉망진창이지만 마지막 문장만은 그나마 마음에 들었기에, 어쩌면 조금 수정될 지도 모릅니다. 부탁 “…약속해 줘 테르. 죽지 않겠다고…. 내가 죽어도 끝까지 살아가겠다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숨을 애써 고르며, ‘그렇게 해줄 거지’라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바라봤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는 것뿐, ‘나 저거 먹고 싶어’, ‘나 어디에 가고 싶은데’라며 조르던 평소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 정말로 내가 그 말에 따라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한 표정. 늘 그랬다. 그녀가 그런 식으로 내게 부탁할 때면 그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이,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고 밤이면 달이 그 자리를 대신하듯이. 내게 있어 그녀의 말과 행동은 나침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내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고 그런 말을 했다면,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어쨌든, 지금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만약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나 자신의 광기에 스스로를 내맡겨 버렸을 테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귓가에서 울리던 그녀의 웃음소리. 조용히 미소짓는다든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 것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시엘이었다. 정말로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듣는 사람마저도 함께 웃어버리게 만들면서 주위의 공기를 순식간에 뒤바꾸어 버리던 그녀였다. 꿈속에서라도 그 웃음소리를 들은 날이면 잠이 깬 후에도 귓전에 선명히 남아있을 정도였다. 비단 기쁘고 즐거울 때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칼을 뽑아 휘두를 것 같은, 칼자루를 쥔 손 마디마디가 하얗게 되어버린 때에도 시엘은 호흡을 잠시 가다듬은 후 ‘하!’라고 웃었고, 그때 그녀의 웃음소리 역시 분위기를 한순간에 뒤흔들곤 했다. 짧은 탄성과도 같은 그 웃음에 혹자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혹자는 그녀가 그곳에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했으며, 나는 그 짧은 웃음이 빨리 멈추기를, 평소의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카락. 그믐날의 밤하늘처럼 새까만 그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 있노라면 금새 아이처럼 잠들곤 했었다. 등을 지나 허리까지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귀찮아하며 매번 싹둑 잘라버리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늘 내게 머리를 묶어달라며 오곤 했다. ‘어머니가 만져주실 때보다 네가 해주는 게 더 좋아’라며 천진하게 웃던 그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수련을 끝낸 후 땀에 젖은 몸을 찬물에 적시고, 아직 맑은 물방울이 머리칼 끝에 맺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달려와 머리끈을 내밀던 그녀를. 온몸이 피로 적셔진 채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탐스럽게 내 주먹 안에 쥐어지던, 그래서 차마 시신과 함께 땅에 묻을 수 없어 지금 내 몸에 지니고 있는 그 머리카락을. 대대로 군(軍) 장성을 배출해 낸 베르타 가의 젊은 수장인 그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무리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시엘을 얻으면 수도 경비대는 물론 최정예 요원들로 구성된 루트 파스의 전력과 신뢰를 함께 얻게 되는 셈이니까. 그러나 가식의 필요성이란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베르타 가문의 전통이자 부조전래(父祖傳來)로 전해오는 경구(警句)―‘최후에 남는 것은 진실뿐이다’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그녀였다. 그렇기에 제일 먼저 표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듣기 좋은 아첨과 교묘하게 꾸민 거짓에 그녀는 늘 단 한 마디로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진실’은 아니오.” 결국 그녀는 그 ‘진실’ 때문에 죽었다. 한두 번쯤은 자신을 굽혔어도 좋을 일이건만,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녀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경쾌한 목소리로 그렇게, 시엘은 말했었다. “넌 지금까지의 시엘 베르타라는 사람을 부정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네가 지금까지 알아온 시엘 베르타를.” ‘살기’ 위해서라고, 살아서 내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아무 소용없었다. 진작에 알고는 있었다. 태어나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함께 해왔던 나다. 매 순간 다른 빛깔로 채색되어 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녀의 기억.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랐다는 것이 지금처럼 고마울 때는 없었다. 나만 조심한다면, 내게 앞으로 남아있는, 내가 죽는 날까지 시엘의 기억을 하나씩 되살려 볼 수 있을 테니까. 두 번은 할 수 없다. 두 번은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이 되고…. 계속 그렇게 하다보면 나는 결국 하루를 그녀의 기억을 연거푸 떠올리는 것만으로 소진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내일 아침해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만은, 절대 할 수 없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래서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내게 허락된 것은 매일 단 한 번씩만 그녀를 떠올리는 것뿐이다. Fin. 2005/11/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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