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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4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  (14)
2007/05/14   [바람의 나라-무휼] 2007년 5월 12일 1회/2회  (4)
2006/07/22   [바람의 나라-무휼]-15일의 단상  (2)
2006/07/17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2)  (8)
2006/07/17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1)  (3)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 [일상/보고, 듣고, 느끼다]

1.
12일 1회 공연을 보고 나서 로비에서 머리를 감싸 쥐는 내게 모 님이 말씀하셨다. “괜찮아, 첫공을 못 봐서 그래. 첫공보다는 훨씬 좋아졌어.” 한없이 늘어지는 팔을 억지로 올려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정으로 잔뜩 곤두선 후기를 쳐내려가고 있을 때 다른 분이 13일 저녁공연은 12일보다 더 나아졌다고, 호동이가 크고 있다고 문자로 알려주셨다. 사실 12일만 해도 1회보다는 2회의 배우들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었고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변화하고 있다는 것,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 아래 똑같은 공연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같은 작품에 같은 배우와 같은 스태프가 참여해서 같은 공연장에서 같은 관객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한다 해도 그 공연은 분명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공연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며 피해갈 수 없는, 그리고 극복해야만 하는 약점이기도 하다. 그 미묘한 변화를 매일 관람하며 파악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상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자신이 보게 될 날의 공연이 가장 좋은 모습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배우와 제작진은 매 회 공연이 가장 좋은 공연이 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12일의 1, 2회 공연을 보고 나서 착잡한 마음을 토로하자 다들 내게 얘기한다. 그래도 나아지고 있어. 내일은 좀 더 바뀔지도 몰라. 충분히 그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잖아. 갈수록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야…. 아마 그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그런 말들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말들이 나오는 것부터가 문제다. 초연도 아닌 재연에서, 그것도 재연을 시작한지 1주일이나 지난 공연이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바뀌고 있다는 것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어떻게 장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처음부터 방향을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관객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자신이 지불한 티켓 금액만큼의 감동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심리다. 나는 공연을 보러 간 것이지 48,000원 짜리 리허설을 보러 간 게 아니다.

애정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애착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저 ‘마음에 안 드니 일단 씹고 보자.’라며 온갖 싫은 소리를 내뱉는 게 아니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라며 애써 아쉬움을 묻어두고 그저 감싸고 보듬기만 하기에는 이 작품에 내가 쏟았던 기대와 애정이 너무나도 크고 깊다. 그 사실이 더욱 나를 우울하게 한다.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무한한 포용력으로 다 품는 것, 그런 것만이 애정은 아니다. 그런 것만이 작품을 위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들 그토록 사랑하는 작품을 옹호하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그토록 아끼는 작품에 칭찬만 하고 싶지 않을까. 때로는 입술을 깨물고 쓴소리를 하는 것. 그런 것도 애정이다. 비록 이런 식으로 그 애정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2.
같은 곡을 전혀 다른 두 개의 작품에 동시에 사용하는 데 대해서 이시우 씨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서울예술단 측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혹시 어떤 조치는 취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저작권이나 로열티에 대해서 문제는 없는지 어떤지도 역시 아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건 있다. 작곡가 이시우는 창작자로서의 도의적 책임을 스스로 저버렸다.

3.
고인 물은 언젠가는 썩게 마련이다. 변화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그렇게 변화했는지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는 그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갖춰야만 한다. 12일의 공연에서 나는 그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4.
그럼에도, 사인을 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아려서.



바람의 나라-무휼

2007/05/14 15:17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14
[바람의 나라-무휼] 2007년 5월 12일 1회/2회 [창고/무대 위의 향연]

원작·1차 각색: 김진
연출·2차 각색: 이지나
작·편곡: 이시우
작사: 정 영
음악감독: 구소영
안무: 안애순
주연: 무휼-고영빈
해명-홍경수
혜압-고미경
호동-김호영
이지-도정주
연-여정옥
괴유-김산호
세류-신영숙
가희-이채경
마로-김백현
배극-배성일
병아리-심정완
새타니(젊은 시절의 혜압)-김은혜
대소-박원묵
대소(젊은시절)-최정수
연비-박석용


5월 12일 15:00(1층 B열 101)/19:00(1층 B열 100)의 후기입니다.



2006년도에 뮤지컬 [바람의 나라-무휼]을 관람했던 이들이라면 이 작품을 두고 상반된 평가를 내렸을 법하다. 철저히 원작에 대한 경외로 가득 차 있던 이 공연에 대해 원작의 팬들은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원작을 잘 모르던 이들마저 ‘카드명세서로 망무기굿을 벌인다.’라고 할 정도로 공연에 몰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등장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와 대립구조를 이미지만으로 풀어가는 진행에 힘들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년의 공연은 당연히 재공연을 기대하게 할 정도의 무언가를 지니고 있었다. 비록 무대 위에서 온전히 자기 노래 한번 부르지는 않았지만 무휼이 왕이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호동왕자가 죽는 마지막 부분에서 무휼이 어린 호동을 껴안고 있는 만화의 장면이 스크린에 비춰지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으며, 12분간의 전쟁씬이 끝나고 괴유가 거칠게 숨을 몰아쉴 때 다함께 두 주먹을 꼭 쥐었고, 저승에서 올라온 해명태자와 그의 연인 새타니가 서서히 멀어지며 노래를 부를 때 그들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렸더랬다. 저마다 기억에 남는 부분들은 조금씩 달랐으되 분명 작년의 공연은 한번 본 관객들이 계속하여 공연장을 찾게 만드는 알 수 없는 흡인력을 갖고 있었고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공연장으로 향하는 이유모를 이끌림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이러한 작품을 만났다는 데 대해서 기뻐하며 다시 공연장을 찾았다. 마치 무휼의 뒤를 따르겠노라 맹세했던 해명태자, 세류, 괴유, 마로, 그리고 고구려의 군사들처럼.

제작진의 고민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뮤지컬 [바람의 나라-무휼]이 아무리 원작만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해도 만화적 이미지를 무대에서 재현하는 파격적이기까지 한 연출이 대다수의 일반관객들에게는 아직 많이 낯설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원작의 팬들과 작년 공연의 팬들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법. 공연예술의 가장 큰 장점은 계속 발전하고 변화하며 진화한다는 것이기에 2007년 [바람의 나라-무휼]이 어떤 변화를 보여주려 할 것인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보다 더 많은 일반관객들을 위해, 더욱 세밀하게, 더욱 친절하게. 그리하여 더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고 그들을 다시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러나 그 변화는 과연 진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제자리걸음일까. 그도 아니면 퇴화해버리는 걸까? 그 과정에서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한다. 2007년 [바람의 나라-무휼]은 많은 것을 잃었다. 혹은, 버렸다. 비록 채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쪼개진 원석의 단면마냥 반짝거리던 것들은 지나친 세공으로 오히려 그 빛을 잃었고, 2007년도 공연을 처음 접하는 이들을 위해 추가한 듯한 새 노래들은 작품에 전혀 함께 녹아들지 못하고 오히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유기적 연결을 방해한다. 좀 더 화려한 볼거리를 위해 넣은 장면들 역시 충분하다 못해 과해서 그 부담감을 더한다. 새로 바뀐 가사들은 지나치게 설명조로 되버리는 바람에 작년의 시적·은유적 표현이 지니고 있던 깊은 맛은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뜬금없이 드라마에 사용되어 2006년도 뮤지컬 팬들을 당혹케 했던(나는 절망했다!) ‘무휼의 전쟁’ 테마는 더 이상 그 곡을 [바람의 나라-무휼]만의 것이 아닌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드라마를 계속 생각나게 하여 작년에 공연을 본 사람은 물론이고 이번에 공연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마저도 그 웅장한 장면을 순수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2007년도 공연은 무휼을 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무휼은 왕이다. 그리고 왕이어야 한다. 이것은 작품을 존재하게 하는 절대명제이며 이 명제가 의심받거나 흔들리게 되면 공연 자체가 힘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무휼은, 왕은, 사람도 아닌가? 왜 인간으로서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면 안 되는가? 이 작품에 있어서만큼은 주인공 무휼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되면 주변인물, 즉 해명태자, 세류, 호동과의 차이점이 없어진다. 그들이 왕 앞에서 머리 숙이는 이유가 없어진다. 왜 혜압과 명림의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르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가야할 곳은 부도다.’라며 발길을 돌리는 무휼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물론 그에게도 인간적인 고뇌는 있다. 그러나 그 고뇌를 본인이 표현하지는 않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는 철저히 왕으로 남아있어야 하고 그가 지닌 고민과 아픔은 그를 따르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된다(해명: ‘그는 외로운 사람이다.’/세류: ‘나의 왕, 어깨를 펴세요.’).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가지 않았어도 되었던 부도로의 길, 왕으로서의 길을 가야 하는 데에서 오는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은 일곱 살 어린 무휼일 때 이미 끝냈던 것들이다(‘더는 약하기 때문에 잃고 살지 않겠다.’). 그는 자신이 왕임을 고민하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많은 목숨들의 무게를 지고 제 손을 피에 흠뻑 적시더라도 왕이기 때문에 견뎌야만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은 왕이십니다. 그리고 왕이셔야 합니다.


혜압이 말한다. ‘그가 옵니다. 고구려의 왕!’ 그 자신이 왕임을 의심하지 않기에 혜압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며 명림의 군사들을 그에게 내주고, 해명태자는 죽어 그의 머리 위에 실리며, 괴유는 천년에 천년을 거듭하여 살 수 있는 생명을 내맡기고, 호동은 그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왕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갈등한다. 그런 그가 왜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해야 하는가? 왜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반문해야 하는가? 의심을 했으면 다시 왕으로서의 자신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의문은 의문 그대로 남긴 채 그는 다시 부도로 향한다. 아니, 향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 관객들은 느낄 수밖에 없다. 무휼이, 그리고 [바람의 나라-무휼]이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전장에서 부르는 무휼의 노래는 왕인 그를 위해 싸웠던 병사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어버리고 왜 괴유와 마로와 세류와 해명태자가 ‘이런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운명을 걸었는지에 대해 관객들이 의심하게 한다. 1막에서부터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왕인 무휼을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극의 중심에서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왕인 무휼이 흔들리자 공연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12일 1회 공연 때 명림숲에서부터 ‘죽여, 죽여, 죽여….’를 외치는 혜압의 대사부터 어딘가 힘이 빠져있다고 느낀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느려진 듯한 템포, 결코 넓다고는 할 수 없는 토월극장임에도 무대 위의 열기가 관객들에게 전혀 와닿지 않는다. 어느 한 사람만이 그렇게 느슨해지고 힘이 없어진 게 아니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늘어지고 힘이 빠진다. 왕으로 걷고 움직여야 할 무휼의 움직임 역시 그냥 정해진 안무와 동선에 따라 움직인다는 느낌이다. 아마 내가 2006년도의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 설명할 수 없는 맥빠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층 객석에서도 손발이 절로 떨릴 정도로 느낄 수 있었던 무휼의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해명태자의 힘을, 혜압의 진중함을 이미 온몸으로 경험한 나로서는 2007년의 이 느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충분히 그 아우라를 드러낼 수 있는, 또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는 배우들이 바뀐 연출 때문에 스스로 자기 존재감을 억누르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라니!!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싶었는지 올해 공연에는 몇몇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무휼과 이지의 첫날밤, 그리고 배극의 죽음이다. 먼저 무휼과 이지의 경우, 지나치다. 만약 막공에서 그랬다면 팬서비스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다. 유혹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려 했다면 ‘조금만 더’라며 아쉬움을 남기는 순간 멈추었어야 했다. 2006년 공연에서 절제된 분위기 가운데 상징적인 안무로 첫날밤의 상황을 표현했다면 이번에는 그냥 ‘대놓고’ 보여준다. 첫날밤의 무휼과 이지는 남자 대 여자가 자아내는 긴장감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다르기에 빚어지는 정치적 대립각을 연출해야 함에도 직접적인 베드신으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죄다 없애버리고 만다. 배극의 등장 역시 작년과 비교하여 대사와 연출이 상당히 바뀌었는데 이 역시 지나치게 수식이 많고 길다는 느낌이다. 만약 작년처럼 공연 전체의 긴장감이 상당히 높은 상태라면 배극의 죽음이 한 박자 쉬어가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극의 흐름을 한층 더 늘어뜨리는 데 일조를 하고 있을 뿐이며 가사의 전달력도 확연히 떨어진다.

연의 노래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2006년 연의 노래에 비해 올해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결론은? 연의 의지 역시 그 부드러움에 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호동에 대한 연의 사랑은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해명태자의 혼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아들을 지키려 했던 연의 확고한 이미지는 한없이 약해져버렸다. 아마 작년의 연(유나영)의 노래가 상당히 강했다는 의견들을 의식한 데서 나온 변화인 듯 한데, 이는 연을 누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변화를 줄 수 있었을 부분임에도 굳이 노래를 바꾸면서까지 연의 캐릭터를 변화시켜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의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에 새로 바뀐 호동 얘기도 좀 짚고 넘어가야겠다. 호동은 나어린 아이가 맞다. 그러나 신수인 봉황을 맞아들이고, 성장하고, 왕 무휼과 대립한다. 비록 온유하고 심약한 부분도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만(‘약한 자는 왕이 될 수 없다.’/칼자루를 바꿔 쥐는 장면) 어린 호동 역시 자신만의 의지와 신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12일의 호동은 호동으로서의 의지가 없었다. 배우의 연기가 나쁜 것도 아니요, 노래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대 위에서 뛰어다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아이였을 뿐, 호동은 아니었다. ‘푸른 하늘 저 부도로’라며 손을 뻗는 그 장면은 호동의 의지가 담긴 외침으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호동을 그저 아이로만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챙, 하고 긴장감을 이어 끝까지 올라가주어야 하는 ‘저 부도로’에서 1회, 2회 두 번 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OTL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바로 2막의 전쟁씬이다. 작년에 비해 한층 다듬어진 안무와 일사불란한 군무는 여전히 좋았다. 무대 위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도약하는 그 힘찬 움직임들에 눈물이 핑 돌려고 할 무렵, 문제의 그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동시에 나는 듣고 말았다. 뒷좌석에서 속삭이던―“[하얀 거탑]?” 그렇다. 나는 더 이상 그 장면을 온전한 [바람의 나라-무휼]로 기억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이건 프로그램에 그 사실을 명시해놓은 것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음악과 딱딱 맞아 떨어지는 안무가 전해주던 치열한 전쟁의 비장함과 엄숙함, 있는 힘껏 잡아당긴 활시위와도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정작 작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드라마로 인해―아니, 솔직하게 말하련다. 뮤지컬을 위해, 그 장면을 위해 만든 음악을 전혀 개연성이 없는 드라마의 메인테마곡으로 이용해버린 작곡가로 인해, 뮤지컬 [바람의 나라-무휼]의 팬들의 기억 속에서 공연의 하이라이트로 남았어야 할 장면이 갈기갈기 찢겨져버린다. 대체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이던가. 무휼의 전쟁이다. 왕의 전쟁이다. 해명의 현무와 세류의 주작이 전장을 가로지르고, 괴유의 백호와 대소의 현무가 맞부딪고, 왕 무휼이 칼을 휘두르고, 왕을 믿고 따랐던 이들이 장렬하게 숨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장면을 보며 울 수 없다. 더 이상 그 장면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질 수가 없다.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온몸으로 전쟁의 비장함을 표현하는 이들을 보며 감동에 젖을 수가 없다. 바로 그 중요한 장면에 사용된 음악을 뮤지컬과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작품의 삽입곡으로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고 만 작곡가 때문에!!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맙습니다. 온몸으로 [바람의 나라-무휼]을 표현해주신 분들.


그래도 올해 공연을 보며 위안을 얻은 게 있다면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멋진 안무다. 작년과 비교하여 더욱 섬세하면서도 박력을 겸비한 앙상블이 전해주는 그 감동이란! 비록 (윗 단락에서 언급했다시피) 음악 때문에 그 감동에 상처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왕의 전쟁을 온몸으로 나타내준 분들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부디 막공까지 몸조심하시기를).

가희와 이지의 표현력도 한층 깊어졌다. 특히 긴 휘장을 다루는 이지의 팔의 움직임은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워서 한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가희는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우리 (완소) 가희 어떡해~.’라는 심정으로 불안해하며 보았지만 대사를 칠 때의 완급 조절이나 노래는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청룡의 표현 역시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다. 올해의 청룡은 긴 소맷자락을 휘날리고 있었는데 이쪽이 더욱 청룡의 움직임에 걸맞아보였다. 나머지 신수의 경우 무휼을 따르는 세류, 해명태자, 괴유가 자신의 신수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뒤의 스크린을 활용함으로써 시각적 효과를 더하는 부분도 상당히 멋졌다. 또한 호동이 칼을 쥐고 장난치다가 처음엔 칼자루를 쥔 상태에서 바닥에 내리꽂으려다 방향을 고쳐 칼자루로 바닥을 내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작다면 작은 부분이지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호동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12일 공연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산호 괴유의 발견이다. 사실 작년의 김산호가 연기한 무휼은 고영빈 무휼에 비해 카리스마가 많이 약했고, 이번 공연에서 내심 걱정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가희와 함께 등장하는 순간 흠칫 놀랐다. 괴유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사를 칠 때의 호흡과 발음이 아직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괴유를 소화해내기 위해 배우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산호 괴유는 물론, 김산호라는 배우가 연기할 미지의 캐릭터들에 대해서도 기대를 품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공연은 진화해야 한다. 또 그래야할 의무가 있다. 매년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르기만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의 변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작품을 작품답게 만든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놓아버린다면? 함축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깊은 의미를 품고 있던 대사, 실험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큰 매력을 담고 관객들을 끌어당겼던 과감한 연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왕 무휼의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와 압도적인 힘. 비록 채 다듬어지지 않아 거친 면도 있었지만 작년의 [바람의 나라-무휼]은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대신 관객들을 확 끌어당기는 힘을 발휘했었다. 그래서 2006년 공연의 마지막 장면―‘가야할 곳은, 부도다.’―에서 부도로 향하는 배우들과 왕 무휼의 발걸음에는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무게가 실려 있었고, 공연을 본 관객들도 마음속에서 그들을 따라 부도로 향할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는 작년 7월 15일의, 온몸이 떨릴 정도로 와닿았던 대무신왕 무휼이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그랬다, 그는 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을 따르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12일의 그와 그들은 어떠했던가. 흔들린 왕의 의지와 그로 인해 설득력을 잃어버린 부도로의 꿈. 묻고 싶다. [바람의 나라-무휼]만이 가질 수 있는, 또 실제로 가졌던 장점들을 스스로 포기하고 존재감을 죽이고 애써 관객들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2007년의 그들은 과연 어디로 향하려 하고 있는 것인가. 왕을 만나기 위해, 다시 그를 따라 부도로 가기 위해 달려갔건만 정작 그러지 못한 나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대무신왕 무휼.
그가 가야할 곳은, 부도다.
 



꼬리1>프로그램에 실린 바람의 나라 인물관계도에서 세류의 그림은 세류가 아니라 어린 호동이다(극장 로비에 세워진 대형관계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어이없는 실수라니. -_-
꼬리2>고백한다. 12일 밤 2회 공연 후 사인회할 때 고영빈 씨를 향해 “무휼 님, 왕으로 남아주세요!!”라고 외친 사람이 바로 나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외쳤는지, 나의 외침을 들은 이들은 과연 알까.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도 계속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발, 왕으로 남아주세요.
꼬리3>사실 김호영의 연기력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는 하나 무대 위에 있는 이들은 당연히 무휼이고 해명태자이고 괴유이고 마로이고 세류이며 혜압임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비해 아직 김호영의 호동은 호동을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좀더 배역에 대한 해석이 깊어진다면 김호영의 호동은 조정석 호동과는 또 다른 매력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007. 5. 14.



고영빈, 바람의 나라-무휼

2007/05/14 00:55 | 관련글(트랙백) 2 | 댓글 4
[바람의 나라-무휼]-15일의 단상 [창고/무대 위의 향연]
어제 빨간그림자 님, 데굴 님과 문자로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는 세 사람이 보았던 15일 19:30 공연의 그 기억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세 사람 중 두 사람만이 강한 왕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한 사람이 아주 약간의 의구심을 표명했다면 모르되, 분명 우리 셋은 감히 어느 누가 재현해낼 수 있을까, 하며 공연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두려워했던 강인하고 고독한 무휼을 보았다. 비록 공연 끝나고 ‘해명태자=킹메이커’ 발언은 내가 제일 먼저 하긴 했지만; 해명태자의 의지가 그렇게 강하게 표현될 수 있었고 그만한 존재감으로 무대 뒤를 관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극의 중심에 무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명이 그렇게 몰아칠수록 무휼이 지고 있는 운명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지고 그의 고독은 더욱 깊어진다. 어느 한쪽이 숨을 죽이면 단박에 그 균형은 깨어지고 만다. 하지만 15일의 해명태자와 무휼은 바로 그걸 해냈었다.

인정한다. 확실히 원작에 대한, 그리고 주인공에 대한 어떤 부분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가에 따라서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 역시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그 각각의 면모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아마도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깊게 무휼의 고독에 끌리고 있었나 보다. 누구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심연. 내가 보길 원한 것은 그런 것이었고,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보았었다. 무대 위의 모든 이들이 그의 앞에서 몸을 굽힐 때, 나도 마음속으로 그에게 머리를 숙였다. 원작의 대한 애정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아니, 원작에 대한 애정 때문에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받아들이기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제작진이 제일 먼저 뛰어넘어야 할 벽도 바로 이거였을 거다. 원작의 팬들을 어떻게 하면 납득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 2001년의 공연을 보고 나와서 못내 마음 한 구석이 허허로웠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15일의 기억을 의심하지 않는다.

분명 이 공연은 원작의 힘을 아주 많이 빌고 있으며, 원작의 팬들이 그로 인해 더욱 환호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연 자체의 힘으로 서 있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휼의 존재감, 그가 그렇게 연기하는 이유의 당위성이 원작의 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에게도 전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아마 제작진에 있어서도, 배우에게 있어서도 꽤 풀기 힘든 숙제일 거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보았던 그 가능성을 믿는다. 아버지로서의 잔상을 누른 채 왕의 모습으로 돌아서던 그 뒷모습을 보았으므로.

꼬리1>무대 위의 존재감은 그 현장에서밖에 느낄 수 없다. 너무나 짧은 공연기간 동안 채 시도해보지 못하고 남겨둔 것들을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수밖에. 판단은 그때 다시 내려도 늦지 않을 거다(그런데 생각해보니 김법래 씨랑 신영숙 씨는 [이] 공연 들어가지, 조정석 씨도 [헤드윅] 뛸 텐데;; 우와아아아앙OTL).

꼬리2>어쩌면 무휼의 어떤 부분에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캐릭터 해석도, 관객들의 반응도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아버지로서의 무휼, 그리고 왕으로서의 무휼. 1~6권까지의 내용에선 아버지 무휼의 느낌이 더 강하다(아마 각종 기사에서도 1~6권 분량을 다루고 있다고 했었지).
연아 걱정마라. 아무도 손 못 댄다. (기억 안 남;)
제 애비가 가진 신기 따위 없어도 아이는 얼마든 잘 큰다. 그런 것 없어 귀신과 놀지 못해도 아이는 너를 닮아 예쁘고 착하지. 그러면 되는 거야.

4권 맨 마지막 뒤에서 두 번째 페이지(생각나는대로 쳐서 정확하지 않다.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봐야지)에 나오는 무휼의 독백. 놀라운가? 글쎄 그도 한때는 이런 대사를 한 적이 있다니까. 그런데 가면 갈수록 그는 그토록 닮지 않으리라 맹세하던 아버지 유리를 닮아간다. 세류가 그에게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몸서리치는 것처럼. 호동이 제 신수를 떠나보냈음을 추발소가 고하자 무휼의 첫 마디가 바로 이거다. ‘왕자가 더 필요하다.’ 그러고는 대비전에서 술 마시다가 밖으로 나간다. 대비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내전에 가서 이지를 취한다(이 ‘취한다’는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 장면에서는 그 말 말고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동안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자신의 원비를. 남편으로서 아내를 안는 것이 아니라, 왕이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왕비를 취하는 것. 해색주와 얘기할 때도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선왕께 꼭 한 가지 동의하는 것이 있다. 때가 오면 태자는 죽여야 하는 법이다.’
마지막의 ‘가야할 곳은, 부도다.’라는 대사에 힘이 실리기 위해서는―10권 이후의 무휼에 대한 이해도 더 필요하다고 본다. 아버지인 자신을 억누르면서까지 왕으로서의 자리를 굳혀야만 했던 그를.
(문제는, 이런 그의 마음 속에도 아직까지 아버지의 느낌이 깔려 있다는 거다. OTL 그러니 사람 애간장이 다 녹는게지;;;)

꼬리3>이러니저러니 해도, (원작과는 또 다른 의미로) 나는 이 공연을 너무나 사랑한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고영빈, 바람의 나라-무휼

2006/07/22 09:58 | 관련글(트랙백) 1 | 댓글 2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2) [창고/무대 위의 향연]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1)에서 이어집니다.

무휼(김산호)+연(유나영)


15일 19:30, 고영빈 씨의 무휼이 부도를 향한 의지로 모든 아픔을 억누른 채 부도를 향해 내달리는 강인한 무휼이었다면, 16일 15:00 김산호 씨의 무휼이 주는 느낌은 한(恨)이 섞인 애잔함이다. 일단 두 배우는 같은 장면에서 대사를 치는 톤이 완전히 다르다. 공연을 보고 난 후 고영빈 씨의 무휼이 주는 느낌이 훨씬 강렬했던 것만은 사실인데, 신기하게도 자고 일어나니 이젠 김산호 씨의 무휼이 자꾸 머릿속에서 맴돈다. 사실 원작의 무휼은 강하디 강한 왕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그 강함만큼 한과 슬픔을 품은 왕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태자의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맞지도 않은 투구를 눌러 쓴 채 학반령에서 적장의 목을 베며 그 피에 온몸을 적셔야만 했던 사내아이, 그가 바로 무휼이다. 명림의 군사들이 그의 앞에 무릎꿇고 일어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전장에 죽어 널브러져 있던 군사들이 천천히 일어나 무휼의 뒤를 따르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해명과 괴유, 그리고 세류가 끊임없이 되뇌던 말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그대의 머리 위에 얹힐 것이다.’―무휼은 이제 그 혼자만의 목숨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까지 모든 것을 건 모두를 위해 살아야만 한다. 그것이 왕의 자리인 것이다. 그 단호한 목소리의 울림, 칼같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절도있는 움직임, 왕으로서의 굳은 의지를 담아내는 힘찬 노래(마마님, 저도 솥단지 이고 전장 따라가게 해주세요 제발. ㅠ_ㅜ). 고영빈 씨의 무휼은 왕으로서의 무휼에 더없이 어울렸다.

그러나 김산호 씨의 무휼은 왕으로서의 무휼보다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로서의 무휼에 더 초점을 맞춘 연기를 보여준다. 단 한명 사랑했던 여인이 자신의 목숨과 바꿔 남긴 소중하기 그지없는 아들과의 살(殺). 무휼 자신이 나아갈 부도와 호동이 지향하는 부도가 다름을 알고, 호동이 자신을 따르기 위해 왕될 자의 표식인 신수를 버린 순간 아들을 왕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아버지. 무휼은 자신은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읊조린다. 아버지 유리처럼 아들을 셋이나 죽이고 남은 생을 회한에 젖는 업을 되풀이하지 않고, 오히려 호동이 꿈꾸는 부도에의 열망을 더욱 자극하여 자신과 반목하게 되더라도(그로 인해 무휼 자신이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자신을 뛰어넘는 왕이 되어주기를 바란 아버지로서의 소망. 김산호 씨의 무휼에서 받은 느낌이 이러했다면, 이건 나만의 지나친 아전인수격인 해석일까? 하지만 원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도 뮤지컬 [바람의 나라-무휼]의 묘미가 아닐는지.

무휼 못지않게 극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역할이 바로 해명태자인데, 15, 16일 모두 김법래 씨의 해명태자를 관람했다. 명림의 새타니에게 말을 건넬 때는 그리도 사근사근하게 말씀하셔서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소녀심을 채가시더니 나중엔 진정 ‘해명태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셔서 여심을 온통 뒤흔들고 말더라(에잉 나쁜 사람). 특히 무휼이 노래를 부르는 대신 안무로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는데 비해 해명태자는 자신의 의지에 더하여 무휼의 의지까지 함께 실어 노래한다. 나중에는 분명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배우인데 어떻게 된 게 그 얼굴은 원작의 해명태자 얼굴이 오버랩되어 보이는 착시현상까지; OTL 해명태자와 함께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인 혜압(고미경) 역시 원작의 팬으로서도, 뮤지컬의 관객으로서도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특히 혜압의 연기뿐만 아니라 극의 장면을 설명하는 나레이터 역할에 시공간을 넘나들며 함께 무대 위에 있는 다른 배우의 연기에 맞춰가는 장면도 많았는데도 전혀 튀지 않는다. 사실 혜압의 카리스마도 무시 못 할 정도인데 그 완급조절이 너무나 매끄러워서 배우의 연기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기도 했다.

무휼과 해명태자, 괴유 등의 남자 캐릭터들이 부각되다 보니 아무래도 세류와 연, 이지, 가희 등의 여자 캐릭터가 약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남자 캐릭터들의 너무나도 바람직한 의상에 비해(하체 선이 확 드러나는 과감한 슬릿, 골반께에 걸친 랩스커트, 헐벗은 상반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남자배우들의 탄탄한 몸매…오 하늘님, 제작진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자 캐릭터들의 의상이 다소 불만족스러운 것도 사실이다(특히 세류 마마님 팔에 둘러진 그 어설프게 나풀대는 하얀 천, 그거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될까;). 하지만 공연을 보며 새삼 놀랐던 것은 결코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이미지를 무척이나 잘 잡아냈다는 것인데 특히 이지가 그러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지의 권력욕이나 개인적인 야심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전무하기 때문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무휼에 대한 감정 뿐인데 이 감정이 바로 그 문제의 ‘첫날밤’에서 적나라하게 표현된다(다시 한번 연출가님과 안무가님께 감사의 삼천배를 마음속으로 올린다). 목소리도 굉장히 아름다워서 ‘모래꽃’을 부를 때의 이지는 정말이지 애절함 그 자체다. 그렇게 애절한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이제! 나는 그가 밉다.’라고 대사 한번 강하게 찔러주시니 보는 사람은 그냥 흐물흐물 녹아버리고; 노래도 좋았지만 ‘이제!’를 외칠 때의 그 감정선이 훌륭했기에 매우 만족.

연의 경우 노래도 연기도 굉장히 강하게 나오는 터라 원작의 연을 기억하는 이들은 살짝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게다가 해명태자마저 ‘그대는 고구려 왕될 자의 아내요 고구려의 어미’라며 칼까지 쥐어주니 용기백배, ‘내가 왕자의 어미요 고구려의 국모다!’ 딱 이 분위기랄까. 물론 그 장면이 연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부분인지라 상당히 부합하기는 한데 사실 그런 연이라면 무휼이 돌아오지 않아도 필요할 때마다 해명태자 불러 올려서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연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는 이지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려냈다면 연은 똑같이 한 남자를 사랑하는 데 더해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면모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지와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면 연의 강인함을 강조하는 것도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싶다.

세류를 연기한 신영숙 씨의 경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연기를 본 이후 이번 공연에서 세류 역을 맡았다는 얘기를 듣고서 무척 기대하고 있었는데 역시 당찬 세류 공주에 잘 어울렸다. 다만 원작에서 세류가 차지하는 중요도에 비해 공연에서의 세류는 그 역할이 무휼의 부하이자 조력자로 많이 축소되었기에 그만큼 세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린 동생을 염려하고 그를 대신하여 싸울 것을 강조하는 누나 세류와, 전장에서 그의 충직한 부하로서 왕을 보필하는 장군이자 한 나라의 공주인 세류로 연기할 때의 대사 톤이 확실히 다르다. 세류의 노래가 더 있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긴 하지만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자면 역시 개인적인 욕심이므로 살짝 접어둔다.

여럿 아낙네 벌써 잡아먹은 문제의 그 백호;;(저 근육, 아주 바람직하다. ㅠ_ㅜ)


무휼의 유려한 움직임과 강인함, 해명태자의 진중한 대사와 듣는 이를 사로잡는 노래에 이어 관객석에 앉아있는 여인들의 혼을 홀랑 빼놓은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백호, 괴유이다. 원작에서도 숱하게 많은 여성 독자들을 울고 웃게 한 인물이 무대 위에 턱하니 나타났으니 어떻게 관객들이 진정할 수 있단 말인가; 첫 등장에서부터 어깨에서 허리께로 이어지는 문양하며, 칼을 휘두를 때마다 꿈틀거리는 그 근육하며, 조명이 비춰질 때마다 근육의 굴곡에 따라 지는 그림자하며, 내 분명 장담하는데 이건 제작진이 대놓고 노린 거다! 안무나 무술 연기에서 가장 고난이도의 연기를 선보이는 것도 바로 괴유인데, 고구려와 부여의 군사들이 2막 군무에서 간결하지만 힘찬 동작으로 전투의 시작을 알리면 고구려의 상장군인 괴유가 검무를 추는 양 화려하고 날렵한 동작으로 군무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양손의 단도를 이용한 기교도 많아서 보는 이도 함께 연기하는 이도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장면들인데 무리없이 소화해낸다. [바람의 나라-무휼]의 이미지들을 완벽하게 구현화하는 데 있어서 괴유는 가히 일등공신감이다.

호동과 병아리는 공연 전부터 내심 걱정하던 부분이었는데 생각 외로 참 훌륭했다. 와이어를 이용한 병아리의 아크로바틱 연기는 무대 위에서 봉황인 병아리를 묘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두 캐릭터가 무휼을 두고 대립하는 부분은 랩으로 처리되는데, 이 또한 작품 내에서 어린 축에 속하는 두 캐릭터를 더욱 신선하게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호동과 병아리는 서로 반목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인데 호동은 자신의 신수를 내칠 수도, 신수와 함께 자신이 바라는 부도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는 병아리를 버리면서까지 아버지 무휼을 따르고자 하지만 기실 그의 꿈은 무휼의 그것과는 겹쳐지지 않는다. 1막 마지막에서 ‘칼을 갖다줘.’라고 호동이 말하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면 붉은 빛 조명이 그 손에 가득 비춰지는데 그 붉은 빛이 강렬해질수록 호동의 말끝은 흐려진다. 아버지 무휼이 어린 나이에 스승 연비를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 백성들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 역시 나어린 호동은 손에 쥐어진 피에 물든 칼을 보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유약하다? 맞다. 2006년 공연의 호동은 여리고 착하고 순진한 아이다. 그런 호동이기에, 그의 죽음을 뒤로 하고 부도로 가야 한다고 발걸음을 옮기는 무휼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에 그 피의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다. 이미 무휼은 너무나 많은 것을 지고 있고, 아들의 죽음을 이유로 부도로의 열망을 늦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아버지인 자신을 접어두면서까지 왕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후대에 대왕(大王)으로, 무왕(武王)으로, 신왕(神王)으로 불린 인물이 바로 무휼(大武神王, 4~44)인 것이다.

원작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바람의 나라』는 무척이나 방대한 작품이다. 분명 처음 시작은 색색의 실 몇 가닥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읽다보면 거대한 비단 위에서 세세한 문양을 짚어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원작의 팬들도 어차피 그 유장한 서사를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풀어낼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한 몇십부작 정도 되는 대하드라마 정도라면 또 모를까. 그렇다 해도 제작진이 서사적 흐름으로 작품을 풀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원작의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형상화한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운 몇몇 장면을 단순히 빌려오는 것만으로 작품이 성립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제작진이 선택한 것은 바로 원작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원작의 탄탄함은 새로운 장르를 창작하는데 가장 심한 압박감이다. 만화 ‘바람의 나라’ 마니아들은 원작이 심어준 이미지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고, 따라서 원작과 새로운 장르와의 비교 평가는 불가피하다. 제작진의 원작에 대한 존경심은 만화 캐릭터의 이미지와 흡사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 뮤지컬 1차 각색을 김진 원작자가 직접 진행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서울예술단 변화의 바람, <뮤지컬 바람의 나라> 프로그램 17쪽에서 발췌


바로 이거다. 이쯤 되면 이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제작진들이 과연 얼마나 원작을 들이팠을까 궁금해질 정도다. 무휼을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들을 추려내고, 그 부분 중에서도 시청각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부분들을 다시 모아서 재구성했다. 대부분의 대사는 원작의 대사를 거의 그대로 따오고(『바람의 나라』의 문학성은 『불의 검』과 쌍벽을 이룬다), 노래로 장면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안무와 그를 뒷받침하는 음악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90% 성공했다. 나머지 10%는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마저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바람의 나라-무휼]이 앞으로 갖추어갈 매력으로 메꿔야만 할 것이다. 이토록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독립적으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분명 원작이 지닌 힘이다. 그러나 뮤지컬 [바람의 나라-무휼]은 『바람의 나라』라는 거대한 서사에 짓눌리기보다 그를 최대한 존중하며 팬들이 꿈꾸고 바라는 이미지들을 무대 위에서 빚어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뮤지컬과는 사뭇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창작 뮤지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진다면 그 또한 분명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단순히 좋아하는 원작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는 감동에서 그치지 않고, 뮤지컬 관람객으로서 기존의 뮤지컬의 틀을 깨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고 듣고 느낀 것으로도 이 작품은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불과 일주일 남짓의 기간으로 막을 내리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작품, [바람의 나라-무휼]. 때로는 산들바람처럼 잔잔하게, 때로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버리는 태풍처럼 강렬하게 우리를 감싸안는 바람처럼, 그렇게 그치지 않고 꾸준히 그 시도, 그 흐름을 이어가주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꼬리1> 이 아름다운 안무들이, 이미지들이 서서히 잊혀지게 놔둘 수는 없다! 서울예술단은 공연실황 DVD를 내든가, 빨리 지방순회공연일정을 발표해주세요! 아님 적어도 OST라도 내든가(흑흑).
꼬리2> 이건 개인홈에만 쓰는 진짜 뱀다리. 해명태자가 킹메이커라면 이지는 암사마귀다(그럼 가희는 빙글빙글?). 사실 아들의 죽음 앞에서 돌아서는 무휼보다도 이지의 육탄공세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 모습이 더 독했다;
꼬리3> 16일 낮의 김산호 씨는 ‘저 부도로’ 첫부분이 다소 불안했다. 시간이 지나면 좀더 안정될 수 있을런지(역시, 첫음 잘못 잡은 게 맞더라;; OTL). 그리고 역시 16일, 연의 노래도 박자가 갈수록 빨라지고; 15일은 괜찮았는데 말이지(훌쩍).

다른 분들의 감상:
팬심으로 만든 뮤지컬 바람의 나라(2006)-빨간그림자 님
원작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한 가이드:
뮤지컬 <바람의 나라> 장면 해석-빨간그림자 님(무엇을 더 숨기랴. 이 글에서 ‘몸만 있으면 돼!’ 운운한 그 지인이 바로 나다. OTL)


2006. 7. 17.


고영빈, 바람의 나라-무휼

2006/07/17 15:52 | 관련글(트랙백) 2 | 댓글 8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1) [창고/무대 위의 향연]
원작·1차 각색: 김진
연출·2차 각색: 이지나
작·편곡: 이시우
작사: 정 영
음악감독: 구소영
안무: 안애순
무술연기 감독: 와이킷 탕
의상디자인: 홍미화
타악구성: 서한우
주연: 무휼-고영빈(15일 19:30)/김산호(16일 15:00)
해명-김법래(15일 19:30/16일 15:00)
혜압-고미경
호동-조정석
이지-도정주
연-유나영
괴유-김영철
세류-신영숙
가희-이채경
마로-김백현(15일 19:30)/이종한(16일 15:00)
배극-임춘길(15일 19:30)/배성일(16일 15:00)
병아리-심정완
새타니(젊은 시절의 혜압)-김은혜
대소-박원묵
연비-박석용


2006. 7. 15. 19:30 2층 C열 40번/2006. 7. 16. 15:00 1층 B열 92번


미리 말해두지만, 2006년 7월 새롭게 단장하여 무대에 올려진 [바람의 나라-무휼]은 지금까지 접해온 뮤지컬과는 사뭇 다르다. 원작 일러스트에 배우 얼굴을 합성한 공연 포스터를 보고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작품은 철저히 원작을 존중한다. 원작의 팬이자 15, 16일 공연을 거의 홀린 상태에서 관람한 본인이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바람의 나라-무휼]은 원작 『바람의 나라』에 바치는 헌사이자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무대의 세트는 최대한 간결하게 유지한 채 부족한 부분은 무대 뒤의 스크린에 비춰지는 원작의 일러스트를 최대한 활용하는데, 시작부분에서 낮게 깔리는 바람소리와 함께 갑옷을 입은 무휼의 이미지가 입체적으로 떠오른다. 맙소사, 그때부터 감잡았다. 이 공연은 팬들의, 팬들에 의한, 팬들을 위한 공연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철저하게 원작의 이미지로 공연을(심지어는 포스터에서 프로그램까지도) 도배할 리가 있나. 여기서부터 공연은 이미 50점 먹고 들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50점을 잃고 들어갈 수도 있다. 원작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호오(好惡)가 완전히 갈릴 수 있다는 뜻이다. 대사의 대부분은 원작 만화에 나오는 대사 그대로이고, 그때그때마다 해당 장면의 일러스트가 스크린에 비춰진다. 혜압이 ‘내가 그의 피를 닦고 그의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이승으로 불러 올리는 굿을 했다.’라는 대사를 치는 부분에서 팬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앗, 저건 3권 105쪽의 혜압!(시공사판 기준)’으로 바로 싱크로해버리는 거다. 몇 십번, 몇 백번을 곱씹어 읽으며 마음에 드는 대사를 수첩에 옮겨 적고 머릿속으로 그리며 꿈에라도 나와 주기를 꿈꿔온 시간이 10년이 넘거늘(참고로 『바람의 나라』는 1992년부터 연재되었다), 바로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배우가 감정을 실어 말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전투를 벌인다. 이러니 원작의 팬들이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원작을 접하지 않은 관객들에게 있어 이 작품은 굉장히 난해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주요 등장인물만 손가락으로 꼽아봐도 다섯손가락이 넘는데, 그 중 어느 하나를 접어버리면 작품의 맥이 끊겨버린다. 결국 원작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이들은 공연을 보며 모든 관계를 짐작해야 하는데, 이게 결코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2006년의 [바람의 나라-무휼]은 매 장면이 사슬처럼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장면의 이미지 자체에 정성을 기울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무대 우측 하단에서 무휼과 이지의 첫날밤이 진행되는 동안 좌측 중단에서는 연이 호동을 구하기 위해 절규하고, 좌측 상단에서는 해명이 나타나 연에게 칼을 건넨다. 한 장면 안에서 현재와 과거,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며 인물간의 갈등 역시 덩굴처럼 얽혀 들어간다. 흔히들 예상하는 일반적인 극의 흐름으로 작품을 이해하려 한다면 십중팔구 1막이 끝나자마자 GG를 외칠지도 모른다. 뮤지컬이면서도 노래에 기대지 않고 대사와 안무, 그 모두를 감싸안는 음악이 빚어내는 이미지로 승부를 내려는 작품이 바로 [바람의 나라-무휼]이다. 그 때문인지 공연이 끝나고 앵콜을 외치려고 해도 그에 화답할 만한 적당한 넘버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그나마 적당한 곡이 ‘바람이 온다’나 ‘저 부도로’ 정도?). 이 부분만큼은 조금 보완이 있어야 할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의 공연되었던 [바람의 나라]에 비해 이번 공연은 굉장히 짜임새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2001년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다룬) [바람의 나라]는 한 곡 한 곡을 떼어놓고 들으면 상당히 좋았지만, 막상 공연장에서는 일관된 흐름을 타지 못하고 끊기는 부분이 없지 않았다. 한번에 듣고 귀에 꽂히는 곡보다 두고두고 들어야 인상에 남는 곡들이 많았던(=어려운 곡이 많았던) 공연이었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는 일단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편하게 와닿는다. 극의 이미지는 여러 챕터로 나뉘어지는데도 음악만큼은 전혀 어색함 없이 자연스레 이어지고 장면장면에 녹아든다(공연을 보는 중에도 음악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사운드트랙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작·편곡을 하신 분이 드라마 [대장금]의 음악을 담당하신 분이었다). 원작을 모르는 관객이라면 애써 작품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차라리 음악에 귀를 맡기고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배우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소득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공연의 진면목을 느끼고 싶다면 적어도 공연 시작 전 프로그램을 미리 구입해서 인물관계만이라도 숙지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재차 언급하자면 이 작품은 (원작의) 팬들에 의한, 그리고 (원작의) 팬들을 위한 작품이다. 공연을 보러가는 사람들도 팬이고, 공연을 만든 사람들도 팬이다. 팬이 아니고서야 원작의 이미지를 이렇게까지 뽑아내어 무대 위에서 형상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비록 스태프 전원까지는 아니겠지만― 배우들 역시 원작을 적어도 세네 번은 읽고 또 읽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시놉시스나 대본만으로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이해하고 소화해내기란 불가능했을 테니까.

<s>킹메이커</s> 해명태자와 무휼<br/>아싸 저 팔근육, 골반께에 걸쳐진 랩스커트, 쫙 뻗어주신 다리(참아라 좀;)


음악 외에 이번 공연에서 중요한 부분을 꼽아보자면 바로 안무이다. 2001년도의 공연에서 군무 장면이 다소 혼란스럽고 복잡하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의 군무는 훨씬 간결하면서도 움직임이 크고 박력이 넘친다. 특히 2막의 전쟁 장면은 결코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더없이 충만하다. 타악기 리듬에 맞춰 발을 구르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귀면 형태의 거대한 방패가 서로 모였다 흩어지는 부분은 마치 난타와도 같은 퍼포먼스를 연상시킨다. 2막 초반의 고구려와 부여의 전쟁 장면에서 급격히 몰아치는 음악에 맞춰, 노래나 대사 없이 12분이라는 시간동안 벌어지는 배우들의 춤과 무술연기는 영화의 그것 못지않게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박진감있고 전투의 중심에서 무대를 휘어잡는 괴유의 안무는 더없이 화려하고 날이 서 있다. 배우들에게 상당히 무리가 가는 장면이었을 텐데도 다들 무난하게 소화해낸다(만쉐이!!). 다만 발을 구르는 장면 등에서 한번에 ‘쾅’하고 울리는 게 아니라 살짝 엇박자로 비껴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은 아쉽다. 이는 공연을 하면서 점차 나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군무뿐만이 아니다. 시작 부분에서 무휼의 움직임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미 스크린에 비춰지는 무휼의 일러스트로 입은 충격에 더해서 크리티컬 히트를 먹여버린다. 이 작품의 색다른 점이라면 분명 주인공은 대무신왕 무휼임에도 불구하고 극의 흐름을 관장하는 역할은 해명태자가 맡고 있고(나는 이 공연의 해명태자를 명실공히 ‘킹 메이커’로 불러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일종의 나레이터 역할은 혜압이 맡고 있다. 무휼의 대사나 노래는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극히 적으며 때로는 무휼의 대사까지 혜압이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바람의 나라-무휼]의 중심은 분명 무휼이다. 명림의 귀신들이, 마로가, 해명태자가, 혜압이, 세류가, 괴유가, 호동이, 연이, 이지가, 대소와 동명왕의 구신들이 제 아무리 그를 비난하고 애원하고 사랑하고 책임을 지우고 꿈을 걸고 목숨을 걸어도 왕인 그는 늘 중심에서 흔들림이 없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 그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바로 춤이다. 어린 호동은 ‘울어서 내보내도 가슴속에 눈물이 차오른다.’며 슬퍼하고 괴로워할 때 무휼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기보다 자신의 아픔과 그를 덮고도 남을 굳은 의지를 유려하면서도 단호한 안무로 형상화한다(2막에 나오는 이 장면은 호동과 무휼의 차이를 한눈에 부각시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백호의 안무 역시 춤이라기보다 액션 연기에 가까울 정도로 강렬한데 그저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음악에 몸을 싣고서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춘다(맙소사, 저 좀 살려주셈. OTL). 설문지에도, 그리고 프로그램을 팔고 있던 극단 관계자께도 애원했지만, 이 작품의 공연실황 DVD를 목이 터져라 부르짖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단 일주일 만에 막을 내리기에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이 작품의 안무는 무척 공을 들였고, 그 아름다움 또한 쉬이 잊혀지지 않는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라면 무휼과 이지의 첫날밤이다. 정략결혼으로 왕비가 된 이지는 무휼을 본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되고, 직접 몸을 부딪치면서까지 그의 사랑을 얻으려 안간힘을 쓴다(1층 객석에서 자세히 보면 무휼 앞에서 휘장을 두르고 있는 이지의 팔이 계속 떨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작에서도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감 넘치던 장면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이렇게까지 관능적으로 묘사될 줄은 몰랐다; 15일 공연을 본 관객 중 한분은 ‘마치 탱고의 한 장면 같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 동작 하나하나는 절제되어 있는데도 성적인 긴장감이 넘쳐서 보는 사람이 절로 얼굴을 붉히게 될 정도다(오해 마시라, 좋아서 그런 거다;). 마치 침상의 휘장(揮帳)을 연상시키는 하늘하늘한 긴 천으로 무휼의 몸을 감싸고 풀어내며 매달리는 모습은 무휼을 향한 이지의 갈구를 표현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바람의 나라-무휼]-원작을 존중함으로써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간 새로운 바람(2)로 이어집니다.


2006. 7. 17.


고영빈, 바람의 나라-무휼

2006/07/17 15:43 | 관련글(트랙백) 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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