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휴가가니? 난 만화책 본다.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근 한 달여의 지루한 장마가 조금씩 끝날 기미를 보이는 가운데 ‘백년만의 무더위’라는 업계의 뻥 아닌 뻥이 사실로 다가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바야흐로 본격적인 무더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이다. 여기저기서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사무실에서는 서로들 안 겹치게 휴가 일정을 잡느라 눈치작전을 펴는 가운데 사무실 말단인 필자는 그저 고참들 일정보고 빈 날짜 챙겨 골라잡아야 하는 가련한 신세. 그렇다고 주머니가 풍족한 것도 아니니 그 서러움은 더해만 간다. 집에 있는 선풍기는 애저녁에 가족들이 먼저 채어간 지 오래라, 손에 들린 것은 얼음 가득 채워진 냉수 한 컵 뿐. 이럴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렇다. 이 더운 여름밤 한순간이나마 더위를 잊게 해줄 만화책 한 권 있다면 젊은 날 한 때 서러움이야 뭐 어떠랴. 자,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한번 훑어보자.
그녀를 아시나요? 『드래곤 헤드』에서 바닥을 알 수 없는 공포와 경악을 안겨 주었던 모치즈키 미네타로가 내놓은(지는 좀 오래 되었지만) 또 하나의 공포물, 『좌부녀』. 이야기의 시작은 지극히 단순하다. 한밤중에 시끄럽게 울려대는 옆집 벨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현관문을 열어본 것.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나만 해도 앞집 벨이 계속해서 울려대면 괜한 호기심에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보곤 하잖나. 그렇게 문을 열었을 때 벨을 누르던 사람이 잠시 전화를 쓰게 해달라고 청한다면? 조금은 찜찜한 기분이 들지언정 그러려니 하고 전화 수화기를 넘겨줄 것이다. 상식적으로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가벼운 친절이다. 그러나 별다른 생각없이 베풀었던 친절에 돌아오는 것은 다름아닌 이유없는 스토킹과 협박, 사람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기묘한 여자. 이름도, 사는 곳도,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 여자가 저지르는 행동은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곧잘 일어나는 일들의 범주에 들어간다. 계속되는 방문, 특정인에 대한 집착,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격한 감정의 표출. 이게 단지 만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들일까? 바로 나만 해도 어제 만난 친구에게서 발신자 표시가 뜨지 않는 전화가 며칠째 계속 같은 시간에 걸려온다며 대체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걱정어린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가. 단순히 육체적인 위협을 가한다는 것만으로 공포감에 휩싸여 거리를 달리는 것이 아니다. 『좌부녀』의 공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현실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단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유없는 폭력의 표적이 되고 마는 현실. 주인공을 결국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그녀의 정체는 결국 『좌부녀』의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더욱 알 수 없는 미궁 속으로 사라져가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녀의 스토킹과 폭력은 어느새 도시의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저 아파트에서 며칠 전에 사람이 죽었대. 어디어디서 교통사고가 났는데 거기서 몇 명이 죽었대. 어제 극장서 영화를 보고 왔는데 글쎄 우리가 앉았던 자리 바로 앞에서 어떤 여자가 죽었대….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일어나는 사건 사고는 전설로, 괴담으로 윤색된 채 더운 여름밤 습기찬 공기에 실려 도시를 뒤덮는다. 누구라도 그런 괴담을 이야기할 수 있음은 물론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그런 괴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좌부녀』가 전하는 진정한 공포이다. 짜증을 한방에 날려버릴 쌈박한 웃음 더위를 식히는 데는 공포가 제격이라지만 그래도 ‘여름=공포’라는 도식은 한 번에 여러 개 찍어낸 풀빵같이 조금 심심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은 특이하면서, 늘어지지 않고, 부담없이 풋 하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작품은 없을까? 여기 당신의 입맛에 꼭 들어맞을 작품이 있으니 바로 김민희의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이다. 이웃나라 비센하르의 기습공격으로 하루아침에 멸망한 르브바하프 왕국. 죽음을 무릅쓴 누나 브루미안 공주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한 왕자 반(이 뒤에 이름이 주욱 더 이어지는데 생략-_-)과 당대 최고의 사상가 시안, 공주의 시녀인 코나는 중립국 고센으로 도망친다.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야만 하는 사명을 지고 있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왕자와 그를 보필하는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한 75세의 사상가, 조그마한 체격의 기운센 천하장사 시녀의 피눈물나는 고군분투기…라고 설명할 수만 있다면 오죽 좋겠냐마는, 이 작품의 미덕은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 힘들다. 이제껏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의 의미, 다스리는 자가 짊어져야만 하는 무게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 없던 왕자 반은 멸망한 나라의 왕자로 숨어살며 생전 처음 백성의 삶을 체험하게 된다. 가치관의 혼란,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백성의 생활에 적응해야만 하는 어려움,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왕으로서의 마음가짐. 그 어느 것 하나 쉬이 넘길 수 없는 문제들이건만 이 작품은 그러한 고민들을 3권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가볍게, 그러나 조금은 생각할 여지를 남기면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마무리짓고 있다.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는 좌충우돌 얼렁뚱땅 슬랩스틱 코미디에만 의존하여 웃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왕자는 왕자답게, 사상가는 사상가답게, 조연인 집주인과 미카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저마다의 성격에 부합하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뜬금없고, 각자의 성격의 차이가 빚어내는 데서 오는 웃음과 갈등 사이사이에 각자의 진지한 고민들이(비록 오래 가지는 않지만) 한데 어우러진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상식이 부족한 왕자. 현자의 마을의 차기 지도자로 뽑힐 정도로 뛰어나지만 어린애처럼 칭얼대는(실제 모습도 애다) 75세의 사상가. 프라이팬 하나 제대로 못 들 것만 같은 가냘픈 소녀지만 나무 한두 그루 정도는 거뜬히 한 팔에 안아서 옮기는 시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이처럼 외모와 실제 성격에서 오는 괴리감은 이 작품의 웃음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주요인이며 독자의 선입견을 역으로 이용한 설정은 이 작품을 더욱 개성있게 만들어주는 부분이다. 게다가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적재적소에 덧붙여져 있는 작가의 해설은 실룩실룩 입가로 비어져나오던 웃음을 급기야 폭소로 만들어버리니 이보다 확실한 애프터서비스가 또 있을까. 아름다운 그림 속에 절묘하게 녹아나는 괴담+웃음 『좌부녀』의 괴담과 『르브바하프 왕국 재건설기』의 웃음을 한 번에 얻음과 동시에 눈까지 즐거운 작품이라면? 바로 오카노 레이코의 『요매변성야화』를 들 수 있겠다. 태어날 때 서운이 드리워졌다는 길조를 타고났다는 선비 이성담은 가는 곳마다 유령이며 요괴, 여우에서 선녀까지 만나는 족족 꼬여드는 희한한 선비이다. 어디 꼬이기만 할 뿐이랴. 아리따운 유령으로도 모자라 미소년 여우와 만리장성까지 쌓고 말았으니 측은하다 해야할지, 그래도 어떻게든 과거에 급제는 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넘어가야 할지. 우여곡절 끝에 과거에 급제한 후 앞으로는 평탄하겠거니 한숨 돌린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름아닌 온 나라에 일어나는 기묘한 초상현실을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 이제껏 겪은 신기한 경험은 액땜한 셈 치고 새 마음 새 뜻으로 살아보고자 했던 고지식한 유학자 이성담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라 하겠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이라면 그의 직속상관인 용옥 장군의 아리따운 미모랄까. 『음양사』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익히 잘 알려진 오카노 레이코의 우아하고 수려한 그림체는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그 빛을 발한다. 『음양사』의 치밀한 펜선에 감탄했던 독자들이라면 『요매변성야화』의 농담(濃淡)까지 생생히 살아있는 유려한 붓터치에도 분명 매혹될 것이다. 때로는 과감하게 생략한, 때로는 가느다란 펜선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그림 속에 오카노 레이코 특유의 진지함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쿨한 유머감각이 뚝뚝 묻어난다. 『음양사』의 히로마사와 가히 쌍벽을 이룰만한, 아니 그보다 더 순진무구한 이성담과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코믹한 등장인물들, 그리고 이성담을 번뇌의 길로 빠뜨리는 쿨뷰티 용옥 장군. 이들이 선사하는 유쾌발랄한 이야기들은 비록 소란스럽지는 않지만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여름밤은 짧다. 그러나 후덥지근한 공기와 끈적하게 습기먹은 이불 속에서 마냥 뒤척거리며 양을 천 마리까지 세기에는 또 길기만 한 것이 바로 여름밤이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하다 괜히 불쾌지수만 더 높이지 말고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만화책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단, 위에서 언급한 작품처럼 길어도 3권을 넘지 않는 작품을 택할 것. 괜히 『유리가면』처럼 한번 붙들면 날밤 새야하는 작품을 골랐다가는 결국 몸만 축나게 마련이다. 더울수록 충분한 수면과 영양섭취는 필수인 법. 한권 혹은 두세 권으로 깔끔하게 짜증을 날린 후 그 여운을 즐기면서 잠자리에 들도록 하자. *블라블라 http://bla2.net 10호 기고문입니다. 2005. 7. 22. 2005/11/2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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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사(陰陽師)-귀신을 쫓으며 달밤을 노닐다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그림: 오카노 레이코(岡野玲子)
글: 유메마쿠라 바쿠 출판사: 백천사(白泉社)/세주문화 권수: 8권~ (1993~) 흔히들 '왜색'이라는 표현을 쓴다. 중국색, 미국색이라는 단어는 없는데 유독 '왜색'이라는 단어만은 존재한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불편한 감정과 편견의 결과이겠지만, 각도를 달리 해서 보면 '왜색'이라는 단어는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만큼 그 나라의 풍류와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본 얼마 안 되는 만화 중에서도 가장 일본적 색채가 강한 작품이 바로 『음양사』이다. 단순히 서기 900년대의 헤이안(平安) 시대라는 설정,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라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스토리를 맡고 있는 유메마쿠라 바쿠의 해박한 지식과 오카노 레이코의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그림이 너무나 잘 어우러져 있는 작품. 귀신과 요괴가 횡행하는 헤이안 시대, 궁궐과 도읍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는 음양사의 이야기. 아름답고 우아한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 『음양사』의 매력은 '귀신 퇴치'라는 음양사의 행적이 저주와 주문이 오가는 싸움이 아니라 시 한 수를 읊으며 귀신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가 있을 곳으로 돌려보내는, 주인공 아베노 세이메이에게 집결되어 있다. 그는 권력에 의해 휘둘리지도 않으며, 번잡한 인간사 때문에 번민하는 일도 없다. 늘 차분하고 냉소적인 성품을 지녔지만 친구에게 술 한잔을 권하는 것을 잊지 않는 부드러운 남자, 세이메이. 그에게 인간들의 감정적인 면을 채워주는 인물이 바로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음악을 사랑하며, 귀신과의 약속마저도 지킬 수 있는 남자. 그리고 너무나 순수하여 잘 속아넘어가기도 하지만 결코 악의를 품지 않는 선량한 남자가 바로 히로마사이다. 음양오행의 전문지식들이 곳곳에 숨어서 세이메이의 입을 통해 히로마사와 독자에게 전해지고, 독자와 히로마사는 그것을 듣고 감탄하게 된다. 히로마사는 세이메이에게 있어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게 하는, 진정한 그의 이해자이며 동조자이다. 일본 역사나 설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없이는 아마 이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힘들 것이다. 특히 7권의 '궁녀시 대회'와 같은 궁궐의 실존 행사에 이르러서는 대체 좌방과 우방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개념을 잡기가 어렵다(언젠가 국문학사 시간에 지나가는 말로 좌방은 唐樂을 가리킨다는 말을 얼핏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역시 모르겠다. -_-a;;) 더군다나 미치자네를 물리칠 때 세이메이가 읊조리는 시도 그렇고, 고전적인 비유와 은유로 가득 찬 문장들을 읽고 있노라면 차라리 그림에만 푹 빠져버리고 싶은 심정도 든다(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_-;;) 그러나 독자로 하여금 이런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그림, 스토리 모두―가 시대 고증과 설정, 연출에 얼마만큼의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증거가 아닌가. 완벽한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면서도 이 작품이 인기를 잃지 않는 이유는 그 난해함을 주인공의 여유와 풍류로 완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귀신을 잡으러 가면서 '풍류에는 술이 빠지면 안되지'라며 술병을 챙겨들고, 귀신이 들려주는 비파 소리에 무신을 시켜 춤을 추게 할 정도이다. 세이메이는 귀신을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닌,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로 본다. 귀신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이해'라는 것이다. 귀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더욱 귀신들이 두려워하는 남자, 아베노 세이메이. 요괴와 악령들 사이에서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는 그는 진정한 음양사이다. 2000.12.23 2005/11/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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