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관 그래피티(麒麟館グラフィティ-)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지은이: 요시무라 아케미吉村明美
『기린관 그래피티』. 어떤 연유로 이 책을 전권 구입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막상 집에 도착한 책들의 래핑을 뜯고서도 한동안은 펼쳐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맥주 한 잔을 옆에 가져다 놓고 하숙집을 무대로 벌어지는 밝고 유쾌한 청춘들의 즐거운 사랑 이야기려니 하고 막연한 기대에 부풀어 집어든 1권은 초반부터 내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마지막 13권에 번외편까지 쉬지 않고 읽으면서 타에와 기쿠코와 우사미와…그들의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에 꽁꽁 매인 채 그렇게 속절없이 가슴만 쳐대었더랬다. 왜들 이렇게 바보 같을까, 왜들 이렇게 답답할까, 왜들 이렇게―. 그래서 한번 읽고 그냥 덮어버렸다. 책을 읽는 내도록 하나 둘씩 가슴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말 못할 그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게 싫었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사랑을 일부러 찾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토록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 실타래를 채 끊어내지 못한 것은 타에나 기쿠코만은 아니었나 보다. 이유모를 먹먹함에 책장 깊숙이 꽂아둔 『기린관 그래피티』 전권을 끄집어내어 또 가슴을 쳐가며 읽어대는 나 자신을 보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아끼고 사랑하기에 타인과 감정을 나눌 필요도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냉혈한 우사미. 그런 그가 자신의 감정을 분출할 배출구로 삼기 위해 선택한 희생양인 순수의 결정체 기쿠코. 우사미에 대한 해묵은 사랑과, 기쿠코에 대한 연민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타에. 그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픔과 고통으로 뒤바뀌고 만다. 우사미 히데츠구라는 난공불락의 거대한 산 앞에서 기쿠코는 매번 눈물을 삼키며 무릎을 꿇고, 타에는 몇 번이고 그 산에서 미끄러지며 울부짖지만 둘 다 우사미에 대한 감정을 쉬이 끊지 못한다. 한번도 사랑받아보지 못했고 한번도 사랑해보지 못했다는 끈질긴 미련 때문에. 만약 2007년 지금, 기린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저런 전개와 속도로 그려낸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단호하게 맺고 끊으며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기에도 바쁜, 소위 ‘쿨하다’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서일까, 『기린관 그래피티』의 그들은 2007년의 우리가 보기에는 한없이 답답하고 바보같기만 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의 실체를 알고 그것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기까지 무려 13권이라는 권수를 요하는 느릿한 전개에 질려 아마 분을 못 이기고 책을 집어던진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느릿함이 바로 『기린관 그래피티』의 최고의 장점이요 미덕이다. 타에를 좋아하면서도 우사미와 맺어지는 이가 타에가 아니었다면 아마 상대방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을지도 모른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기쿠코와, 기쿠코의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눈물 흘리던 타에가 우사미에 대한 사랑과 욕망을 끊지 못해 결국 그의 품에 안기는 모습들은 한두 권의 분량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타에의 감정, 기쿠코의 감정, 우사미의 감정은 제각각 A, B, C라는 명찰을 붙이고 차곡차곡 분류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작품 속 인물들도, 작품을 읽는 이들도 대체 세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결국은 다시 앞권으로 되돌아가는 일을 수차례 되풀이한다. 오직 작가 한 사람만이, 당최 풀어낼 길이 전혀 없어보이는 감정의 혼돈 속에서 흔들림없이 중심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지럽기만 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번 숨을 멈추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칼로 물 베기’라고 하지 않던가.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명확한 주어와 서술어로 구사할 수 있다면야 오죽 좋겠냐마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미묘한 떨림이 더 큰 감정의 파장을 낳기 마련이다. 더구나 타에와 기쿠코, 우사미처럼 애증과 집착과 연민과 환멸까지 뒤섞인 사이라면 더더욱. 그런 복잡다단한 감정을 ‘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늘 갈등하고 망설이고 서로를 시험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입혀가며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서히 깨달아간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한 겹 두 겹 쌓여온 감정의 더께들이 조용히 때를 기다리다가 딱딱하게 굳은 상처를 내보이며 진심을 전하는 그 순간, 작품 속 그들은 겨우 도달한 희망의 문 앞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작품을 읽는 이들은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찾은 행복의 여운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 이제야 겨우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는 행복해져라, 라고 말할 수 있구나 하고. 힘겹게 얻은 사랑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깨닫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기에, 『기린관 그래피티』가 전하는 그 아련한 느낌은 아마 10년 후에 다시 책을 들추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삿포로의 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온 짧은 봄이 그토록 반갑고 아름답듯이, 그들의 사랑 역시 그렇게 반짝일 수 있었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이 몇 해가 지나도 빛바래지 않는 것처럼.
2007/07/09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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