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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빠르망(L'Appartement)-우연과 필연, 그 경계선의 사랑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질 미무니Gilles Mimouni (1996)
주연: 로만느 보랭제Romane Bohringer (알리스Alice)
뱅상 카셀Vincent Cassel (막스Max)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 (리자Lisa)
장-필립 에코피Jean-Philippe Écoffey (뤼시앙Lucien)
올리비에 그라니어Olivier Granier (다니엘Daniel)


사랑에도 순서란 것이 있을까? 내가 먼저 저 사람을 보아 왔으니 나에게 저 사람을 사랑할 권리가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그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도 좋다는 사랑에의 갈구…. 자, 그러면 또 다른 얘기를 해보자.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과정에서 우연과 필연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일상의 수많은 흔적들 가운데서 내 시선을 붙들어놓는 그 '순간'을 만나는 것이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뒤 역시 '우연'의 몫일까, 아니면 자신의 '의지'가 개입된 노력에 의한 '필연'에 의해서일까?

고장난 캠코더 수리를 위해 돌려본 화면에 나온 리자를 본 막스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고장난 탓에 목소리도 들리지 않건만 TV 모니터 여러 대에 클로즈업된 리자의 얼굴은 말 그대로 막스의 가슴속에 '각인'된다. 사랑의 시작―우연. 막스는 리자의 뒤를 쫓아 거리를 헤매고 결국 그녀의 사랑을 얻는다. 하지만 막스에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계기를 만들어 준 그 고장난 캠코더가 막스의 일터에 맡겨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막스의 사랑을 원했던 또 다른 여자 알리스. 알리스는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개척하려 하지만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맞은편 리자의 집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 리자와 막스를 무참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것뿐이다. 하늘에서는 비가,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막스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다는 리자의 말을 들은 알리스는 어긋난 '순서'를 바로잡기 위해 그들의 사랑에 개입하기로 결심한다.

리자의 뒤를 쫓던 막스가 다다른 곳은 다름아닌 연극무대. 그곳에서 리자는 『한여름밤의 꿈』의 헬레나의 대사를 연습하고 있다. 이토록 사랑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드미트리어스에 대한 원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슬픔, 자신이 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허미아를 향한 질투와 동경. 그러나 실제 영화상에서의 리자는 허미아이고, 리자를 부러워하는 헬레나는 바로 알리스이며, 드미트리어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헬레나의 대사는 바로 알리스의 마음이다. 결국 알리스는 리자와 막스가 헤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고, 2년 후 연극무대에서 마치 현재의 자신과 같은 역할―헬레나를 연기하게 된다. 2년 전 리자의 생활을 그대로 반복하는 알리스. 리자의 아파트에서 리자의 차를 몰고 리자가 입던 검은 원피스를 입고 리자가 연기했던 헬레나를 재현한다. 그리고 또 다시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만날 뻔한 리자와 막스를 지켜본 알리스는 이번에는 그야말로 그들의 '우연'을 원천봉쇄 해버린다. 더 이상은 우연에, 인연에, 운명에 농락당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의지로 사랑을 얻기 위해.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뤼시앙을 상처 입힐 줄 알면서도, 어쩌면 정말로 '한여름밤의 꿈'으로 끝날 줄 알면서도 그녀는 달려갈 수밖에 없다. 2년 전의 '순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막스 당신을 처음부터 사랑해온 것은 리자가 아니라 나였다고!!

2년 전의 리자를 찾아 헤매던 막스는 현재의 '리자'―알리스를 만나 또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알리스의 층층이 쌓인 거짓말 위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라고 자신을 비난하는 막스에게 '그녀의 마음을 아느냐'라며, 어쩌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막스를 사랑해 왔을 것이라며 조용히 대답하는 알리스. 막스와 알리스, 리자, 그리고 뤼시앙의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며 그들의 진실이 드러난다. 단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내던지고 거짓을 그럴듯한 진실로 포장하고, 파멸로 끝날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막스의, 알리스의, 리자의 사랑. 깨어진 콤팩트의 거울처럼 거짓은 깨어지고, 조각조각 부서져 상처 입은 네 사람의 마음을 비춘다. 막스는 어쩌면 진짜 리자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지금'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가짜이지만 지금 그에게 있어서 '현실'의 리자인 알리스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오는 현실 역시 알리스의 의지에 의해 일그러져 있는 일종의 이공간이다. 막스는 공항에 그를 마중 나온 약혼자, 즉 '진짜 막스'의 '현실'과 맞닥뜨리고, 알리스는 약혼자와 포옹하는 막스를 보면서 진실과 현실이 겹쳐지는 그 순간 미소짓는다. 그리고 더욱 처참한 현실. 애인의 오해와 질투 때문에 리자는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그녀의 아파트에서 불길에 휩싸인다.

이쯤 되면 다들 알리스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알리스가 아니었다면 막스와 리자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을테고, 2년 후 또 다시 그녀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막스와 리자는 다시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알리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마치 미친 사람처럼 리자의 뒤를 밟고 리자의 아파트를 추적하는 막스와, 단 하루라도 막스를 만나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하고 헬레나의 대사를 읊으며 고통에 시달리는 알리스가 다를 게 무엇인가? 당신을 먼저 사랑한 것은 나인데, 단 한순간의 우연이 당신에게 다가갈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다면? 우연이 나의 사랑을 가로막았다면 나의 의지로 그 사랑을 되찾으리라…! 이런 알리스를 비난할 자격이 막스에게 있단 말인가?

[라 빠르망]은 정교한 시나리오와 작품 곳곳에 깔린 세심한 복선을 통해 모든 사건이 단순한 우연이 아닌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들의 애증이 시작된 리자의 아파트―그곳에서 누가 살았고,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그곳에서 사랑을 나누었으며, 누가 그 사랑에 종지부를 찍었는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TV 화면에 가득한 모니카 벨루치의 눈부신 미모. 또 막스를 향한 사랑과 리자에 대한 질투와 동경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로만느 보랭제. 현재에 살면서도 과거의 리자를 잊지 못하는 뱅상 카셀의 위태로움. 이들을 안정감 있게 받쳐주는 장-필리페 에코피의 연기. 과거와 현재를 포개고 연결한 절묘한 연출과 스피디한 전개, 아름다운 색조의 화면. 이 모두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편으로는 복수극이고 한편으로는 스릴러이고 한편으로는 추리물인 [라 빠르망]을 더없이 아름답고 슬프고 처절한 러브스토리로 승화시킨다. 사랑의 시작은 우연일지 몰라도 사랑의 지속은 노력에 의한 필연에서 비롯되는 것. 그것이 [라 빠르망]의 교훈이라면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2003.6.2.


2005/11/26 21:24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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